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얀 May 06. 2022

에버랜드에는 있고 롯데월드에는 없는 것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이


    4월 8일은 회사 창립기념일이자 단체 휴무일이었다. 평일 휴무일이야말로 사람 많은 곳에 가기 딱 좋은 날이며, 이번 주가 애인과의 5주년 주간이고 하니, 겸사겸사 에버랜드에 갔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에버랜드에 가는데, 둘 다 놀이기구를 엄청 좋아한다기보다 맥주 한 잔에 훈제 소시지를 먹으며 그 계절의 날씨를 즐기고 동물을 보고 조경을 감상하기 위해 간다.


    에버랜드에서 또 하나 빼먹을 수 없는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어린이들이다. 유아차에 실려 팔자 좋게 자는 아이, 엄마 손 잡고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 공주님 프릴 드레스 입고 왕관까지 쓴 아이, 아빠 가슴팍에 폭 안긴 작고 소듕한 아이…. 돌도 안 지난 쪼끄마한 유아부터 어른보다 겁 없는 초등학생 어린이까지 그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에버랜드다. 아무리 바글바글한 인파 속이라도 아이들은 굉장히 눈에 띄기 마련인데, 귀여운 차림의 아이를 보면 애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 팔을 툭툭 친다. 방금 저 애기 봤어? 봤어 봤어 졸귀탱. 우리는 그들에게 초미니 뻬이비, 비눗방울 어린이, 양갈래 키드 등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면서 앞날을 축복하곤 한다.


    우리는 <레니의 마법학교>라는 어트랙션에 줄을 섰다. 앞뒤로 기울어지는 좌석에 탑승해 자리에 놓인 마법봉으로 드래곤을 무찌르는 일종의 슈팅 게임이었다. 굉장히 무해한 어트랙션인 탓에 아이들도 굉장히 많았다. 먼저 대기 중이던 팀들이 마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며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캐스트(알바생) 분이 윗부분이 기역자로 꺾인 봉을 들고 다니며 줄 서 있는 어린이들의 키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앞의 어린이들이 잘 넘어가고, 우리 앞 앞 팀의 어린이 차례가 왔다. 키 재는 봉의 윗부분이 아이 머리 위를 여유롭게 지나갔다. 어린이는 110cm가 되지 않았다. 캐스트가 봉을 살짝 기울여도 보았지만 봉이 머리에 닿을 리가 없었다.


    캐스트는 정말 곤란한 표정으로 “저희가 1cm까지는 봐드리는데 지금 어린이가 그 키가 도저히 안 된다”며 탑승이 불가함을 정중히 알렸다. 안전바가 신장 최소 110cm 어린이에게 맞춰있기 때문에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작을 경우 안전바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부모가 몇 번이고 ‘옆에서 잘 잡고 타겠다, 이미 꽤 기다렸다’는 식으로 몇 번 되물었지만 캐스트는 안 된다며 일관했다. 아이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그래도 자긴 탈 거라며 조용히 칭얼댔다.


    그때 캐스터가 <약속카드>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가 약속카드를 써 줄 테니, 다음에 키가 더 커서 다시 오면 그땐 1등으로 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아이는 가만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마스크로도 그 실망한 표정을 감출 순 없었지만, 아까보다 포기한 듯 보이는 아이는 보호자 품에 안겨 캐스터의 안내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도 애인도 <약속카드>라는 말을 처음 들어봐서 그 약속카드가 진짜 있는 건지, 아이를 회유하기 위한 거짓말인 건지, 아니면 캐스터 개인이 기지를 발휘한 것인지 몰랐지만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놀랍게도 <약속카드>는 에버랜드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제도였다.


출처 : 에버랜드 공식 블로그


에버랜드 공식 블로그의 약속카드 설명

https://www.witheverland.com/551


약속카드를 사용한 어느 가족의 후기

https://blog.naver.com/bjstour/220605711451




    2009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약속카드 제도는 키 때문에 탑승이 제한되어 실망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이자, 가족들이 에버랜드에 또 올 수 있게 하는 영리한 정책이었다. 일부 어트랙션에 한해 제공되며, 추후 재방문 시에 캐스터에게 제시하면 정말 줄 서지 않고 바로 태워준다고 한다. 우유도 많이 마시고, 멸치도 많이 먹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놀이기구를 타게 될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 해진다.


     유치원 다닐 적부터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온 가족이 연간회원권을 끊어서 다녔음에도, 나는 쫄보여서 약속카드를 발급할만한 놀이기구를 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 카드에 대한 기억이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지금까지 2년에 한 번씩은 갔을 텐데, 나에겐 자녀가 없으니 카드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날 <레니의 마법학교>를 타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계속 몰랐을 것이다.


     또 다른 놀이공원인 롯데월드는 어떨까? 구글링을 해보니 롯데월드에는 딱히 약속카드 같은 제도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롯데월드는 접근성이 좋고 어트랙션 중심의 놀이공원이라는 점 때문에 중고등생 또는 대학생이 많이 가고 (마케팅 타겟도 학생들이어서 에버랜드보다 폭이 좁은 편이다), 에버랜드는 동물원, 피크닉 공간 등 어트랙션을 타지 않아도 즐길거리가 많은 넓은 부지 덕에 상대적으로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다. 괜히 대한민국 대표 놀이공원 아니랄까. 에버랜드의 약속카드는 정말 작은 아이디어지만 그만큼 섬세하여 감동이 배가 된다. 오랜 서비스 짬바와 고객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근래에는 이렇게 아동 친화적인 공간을 방문할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약속카드 발급 대상자도 아니고 그럴 애도 없는데 살짝 눈물이 날 것처럼 감동스러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노키즈존'을 떠올렸다. 아동을 보호하겠다는 명목 하에, 혹은 아동과 그 보호자가 일으킬 '민폐'를 막기 위해 아동의 출입을 아예 금한다. 이런 최근의 행태는 합계 출산율 0.84와도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몇 번 노키즈존 업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편안했나? 어른들이 ‘어른’답고 교양 있었나?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적막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없어진 세상만큼 고요하고 적막한 곳이 또 있을까. 아동 또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는 중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잼민’이라는 워딩으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다채롭고 풍부한 곳이다. 아동도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고 타인을 의식한다. 일상에서 예의범절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노키즈존의 범람은 사회로부터 아이들을 자꾸만 격리하여 그들의 권리를 앗아가는 것임이 명백하다.


예스키즈존을 다룬 기사

https://www.khan.co.kr/life/life-general/article/202203260600001


  노키즈존에 반해 예스키즈존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예스키즈존이라는말도 사실 어폐가 있다. 어린이는 어느 공간에서나 환영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 시절을 지나왔고,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합당한 대접을 받아왔고, 덕분에 어른으로 성장했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도 많은 고민이 든다. 아동을 위한 콘텐츠를 어른들이 밈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거기에 자본이 깃들어버렸다. 잔망루피에서 ‘뽀로로’와 ‘아동만화’의 뉘앙스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현재 불가리 브랜드 엠버서더로까지 활동 중이니, 마케터들이 생각하는 잔망루피의 타겟 명백히 성인이다. 그의 성공에 힘입어 같은 시리즈에 등장하는 북극곰 캐릭터인 ‘포비’ 이모티콘도 등장했다. 자꾸만 아이들의 것을 어른이 앗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주린이, 코린이 등 미숙함을 이르는 말도 최근에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숙한 어른은 미숙한 어른 그대로 칭하면 된다. 어린이를 미숙한 존재로 치부하며 본인들을 굳이 거기에 빗댈 필요가 없다. 미숙한 것은 어린이가 아니다. 어린이를 취사선택하는 어른들의 사회가 미숙하다.


   다시 ‘약속 카드’로 돌아가서, 어린이가 한 명의 주체로서 존중받는 경험을 선사하는 에버랜드의 이 서비스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린이는 어른이 시키고 가르치는 것만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예의를 갖추고 대해야 할 한 명의 사람이다. 어린이를 격리하지 않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일, 세상의 원리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어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어린이를 품기에 과분한 사회다. 아동에게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만 어른들은 자신들이 허락한 아동의 형태만을 받아들인다. 어린이와 소통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들은 마냥 유약하고 미숙하지만은 않다. 더 많은 어른들이 어린이와 만나야 한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세상과 만나야 한다. 한 명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한 때 어린이였던 사람으로서 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앞날을 응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 빌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