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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Apr 16. 2024

춘곤증

퀴어키토라이팅클럽 키워드 [봄]

헤더 : ⓒ그린나래미디어㈜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를 보고 쓴 짧은 픽션입니다. 영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며, 캐릭터 및 소재에 대한 해석은 원작자의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은은 늘 자신이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눈을 감고 잠시 어둠 속에서 헤매는 기분을 느끼다 보면 머지않아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붙잡으며 깨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하은은 꿈을 믿지 않았고 꿈에서 자꾸만 징조를 발견해 내려는 사람들 앞에서 마치 미신을 깨부수려는 과학자인양 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하은에게 쏘아붙였다. ‘너 깜깜한 거 그것도 다 꿈이야.’


    그 애는 반에서 꿈을 가장 많이 꾸던 아이였는데 계속 꿈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비 예보가 있다가 사라지면 자기 꿈 덕이라고도 했고, 길 가다 죽은 참새를 발견했을 땐 어제 사나웠던 꿈자리에 대해 읊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그 애가 짜증 나서 꿈에 대한 과학교양서적을 읽어다가 눈앞에서 통째로 인용해주기도 했다. ‘꿈은 뇌가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와중에 튀는 뉴런 신호의 부산물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하은은 자꾸만 그 문장을 되새겼다. 꿈이 찰나의 스파크라는데. 너는 왜 10년째 내 안 어딘가 깊숙한 곳에 머물면서, 이미 찰나는 한참 넘어섰는데, 자꾸 꿈에 나오는 걸까.


    기억 속에서 꺼내기 전까진 항상 흐릿했지만 하은은 반드시 세미의 얼굴과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세미를 만난 이후로 하은은 이상하게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미를 만나기 전부터 꿈을 꾸고 있었다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했고, 세미가 사라진 이후 꿈이 시작됐을 수 있다는 가정도 동시에 성립했다. 확실한 것은 봄이 그 기점이 되었다는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4계절 중 봄에 가장 꿈이 잦아졌다. 하은은 목련이 피거나 황사가 오는 것보다도 꿈의 빈도를 느끼며 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의 소재는 반복에 변주를 거듭해 도통 동이 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미가 주인공일 수도 있었고, 세미의 앵무새 조이, 강아지별로 떠난 제리, 미술 수행평가로 만든 공룡, 노란 리본이 가득 달린 삼나무, 내가 살면서 삼나무를 본 적이 있나 싶다가도 확실히 삼나무로 보이는 그 나무. 꿈이 펼쳐지는 장소도 널뛰었다. 2년 뒤에 입학하게 될 영화과의 지도교수 사무실이기도 했고, 세미가 사라져 버린 남도 어딘가의 바다이거나, 세미의 목덜미 언저리, 새장,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 소리는 풍부하거나 지나치게 적었다. 사람을 흉내 내는 새소리도 들려왔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한자 단어, 울음소리, 한자가 적힌 종이를 태우며 우는 소리, 한쪽 이어폰으로만 듣느라 가끔 멜로디가 아닌 비트만 들리는 스테레오 음원, 심지어 햇빛에마저도 소리가 깃들기도 했다.


    세미가 말했다. 봄이 오면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진대. 스프링 피크라고. 그래? 세미가 잡상식을 늘어놓으면 하은은 무던하게 반응해 주었다. 세미가 만족하지 못하면 하루 종일 하은에게 매달려 관심을 가져달라 촉구했고, 하은은 그런 세미의 반응을 즐겼다. 세미가 짧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꿈치를 조몰락거리는 것이 좋았다. 하은은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살의 빈도를 느끼며 봄이 왔다는 것을 깨닫겠네. 봄 되니까 움츠렸던 기운이 솟아나다가 죽을 기운까지 같이 솟아나는 건가?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자 세미가 그걸 듣곤 버럭 했다. 다들 잔뜩 죽어 나가도 넌 죽으면 안 돼! 세미의 비죽이는 입술. 하은의 눈에 압인처럼 박혀버린 입술. 그 입술은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말을 건넸다. 네가 죽으면 내가 슬플 거야. 네가? 내가?


    며칠 뒤 하은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세미와 함께 손꼽아 기다려 온 수학여행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하은은 다치는 순간에도 세미가 얼마나 잔소리를 할지 잔뜩 기대하며 아파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미는 하은이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 자신이 키우는 앵무새처럼 조잘댔다. 하은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서는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마음껏 감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세미의 여운과 부재를 즐기며 병원 정원의 벤치에 누워있는데, 멀리서 세미가 달려왔다.


    꿈에서 하은이 죽었다고, 너무 불안해서 다리가 부러진 하은을 두고 수학여행을 갈 수 없다며 세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은이라고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은은 끊임없이 상상해 왔다. 하은은 바닷바람에 정신없이 휘둘리며 갑판에 올라가 세미의 모자를 잡아주고 싶었다. 세미는 나보다 키가 작으니까, 나는 그래도 운동신경이 있으니까, 멋있게 모자를 낚아채고 놀려야지. 그 장면도 꿈에 나온 것 같았는데, 하은의 상상이 먼저인지 꿈을 꾼 뒤로 그 상상을 멈출 수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봄이 왔다 싶었다. 하은은 자주 졸았다. 잠 속으로 자주 사라졌다. 세미가 영원히 사라진 곳으로 하은은 잠깐 사라졌다. 빽빽한 삼나무 숲 입구에 세미가 서있었다. 바람은 옅고 낮은 덤불에는 흰 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하은과 세미 사이에는 영화관 1열과 스크린 사이 정도의 거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미는 자꾸 입모양으로 똑같은 단어를 반복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미야 나 입술 못 읽어. 크게 말해줘. 대신 세미가 키우던 앵무새 조이가 하은 앞으로 다가왔다. 하은은 손에 들려있던 캠코더로 조이를 찍기 시작했다. 조이는 화면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거 알아? 우리의 패배는 아침까지 이어진다.


    하은은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구겨진 몸을 펴냈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잎이 돋아난 개나리가 있었다. 그 옆엔 져가는 목련과 진달래가 있었고, 만개한 벚나무도 보였다. 창 틈새 부는 바람에는 라일락 향마저 났다. 꽃투성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차례로 피는 꽃을 보며 설레었던 하은은 부탁한 적도 없는 선물을 한 번에 받는 기분이었다. 꽃이 동시에 피는 곳은 저승 밖에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저승 치고는 꽃 냄새가 향기로웠고 힘껏 켠 기지개는 시원했다. 봄꿈에서 깬 낮이었다.


    하은은 10년 전, 캠코더에 담긴 세미를 보면서, 눈앞에서 사라진 세미를 생각하며, 세미를 울고, 세미를 외치고, 세미를 꿨다. 자꾸 내 안에만 살아있는 것 같은 세미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정교화하다 보면 어느샌가 세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혼자만 봄 꽃 속에서 낮잠을 자서 미안하다고 엉엉 울면,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해줄 세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은은 추운 겨울에도 지나치게 잠에 빠지지 않았고 누구보다 잘 버텨냈다. 잠을 잘 자는 것이 인생이 목표였을 때도 있었고, 일출에 맞추어 잘 일어나는 것이 목표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꿈을 동반한 춘곤증을 하은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맞다, 나 꿈꾸는 사람이었지. 자꾸만 누군가 꿈을 상기시켜 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맞다, 세미가.


    하은은 자신의 캠코더에 정말 조이가 말을 하는 장면이 찍혀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우리의… 아침에 대한…. 세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찍었나? 찍혀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꿈의 기억은 머지않아 옅어졌고, 하은은 캠코더를 확인하지 않았다.


    하은은 월말까지 내도 되는 공과금을 미리 냈다. 냉장고에 죽어가는 채소로 볶음밥을 해 먹었고, 얼굴에 돋은 뾰루지를 컨실러로 가렸다. 기다란 돌돌이로 자취방 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을 훔쳤다. 택배상자에서 테이프를 떼어 납작하게 접었다. 내일 황사가 온다는 뉴스를 보고 마스크가 몇 개 남았는지 셌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된 기프티콘이 있는지 확인했다. 간밤에 물린 모기자국에 열십자로 자국을 냈다. 당근마켓에서 나눔 받은 가계부를 펼쳐 월급날 전까지 얼마나 돈을 쓸 수 있을지 가늠했다. 다음 생리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헤아렸다. 건조한 발뒤꿈치에 바셀린을 발랐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뒤, 하은은 다시 봄꿈에 빠졌다. 그 꿈에 더께가 앉은 캠코더가 나왔다. 작은 화면 속에 익숙한 초록빛 앵무새가 보였다. 하은은 ‘역시 찍혀있었네’라는 생각을 했다. 삼나무 숲을 지키는 세미도 함께 찍혀있었다. 세미야, 뭐라고 한 거야? 하은은 몸에 열이 오르며 깨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수 백번 돌려본 끝에 하은은 마침내 세미의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하은은 급하게 종이와 펜을 꺼내 받아 적었다. 숲새로 비져나오는 바람에 얇은 종이가 펄럭였다.


    하은이에게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2014년 4월 16일

    세미가









    세월호 참사 10주기,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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