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문학 키워드 [멕시코]
출근하는 애인이 안쓰러웠다. 말이 출근이지. 냄새가 가장 적은 파스를 사다가 손목에 붙이고, 갓 다려서 따뜻한 유니폼을 종이 쇼핑백에 담아다가, 안녕 키스도 잊고 급히 나가는 애인의 뒷모습을 보고, 다연은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언니는 또 노동을 하러 가는구나.
철과 유리로 된 문이 닫히며 진동했다.
꽤 비싼 레스토랑의 2부 저녁 서빙을 맡은 그녀는 다음 달부터는 1부부터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다연은 본인의 철없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럴 거면 왜 같이 사냐면서 애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우는 소리를 냈다. 그게 어젯밤이었다.
맞닿을 살이 사라지자 이제 막 장마철을 맞이한 반지하 공간이 아주 조금 쾌적해졌다. 다연은 포트폴리오 뭉치와 연필과 파스텔을 꺼내 들었다. 습기에 취약한 그것들은 위험한 계절을 맞이했다. 친구네 작업실에 맡겨놓는 편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애매한 일러스트들을 한 장씩 넘겼다. 여자들, 깃털과 부리가 달린 동물들, 꽃술, 여자의 입술, 자고 있는 골반, 손톱이 정돈된 손가락. 별 불평을 하지 않는 클라이언트들은 모르지만, 색을 넣든 넣지 않든 다연의 눈에만 보이는 불명확함이 그녀의 신경을 옅게 긁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국제전화를 의미하는 긴 번호로. 소현이었다. 워낙 오래된 친구다 보니 그녀와 메신저는 많이 주고받았지만 서로 전화를 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전화라는 매체 자체가 생각보다 큰 노력을 요하기도 하지만 다연 쪽에서 통화를 꺼렸는지도 모른다. 면세점에서 매번 선물을 사다 주는 유학생 남자를 사귀고, 파티의 단체사진에서 명치와 꼬리뼈까지 파인 드레스를 입고, 일 년에 몇 천만 원은 넘는 캐나다 대학의 학비와 그에 버금가는 생활비, 교통비, 기숙사비를 거뜬히 내는 소꿉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공중에 붕 떠있는 존재였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다연이 여자친구와 둘이 살 방을 구하고 월세를 내기 위해 구인광고를 찾고 편의점 알바를 하는 친구들로부터 폐기 도시락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다. 같이 대걸레를 빨고 급식을 먹고 교복 치마 길이에 예민해하며 웃던 순간들은 그 순간대로, 다연은 그녀 멋대로, 서로 시간의 축에서 엇갈리고 있었다. 다행히 질투도 자괴감도 위화감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비교 지점이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다연은 소현이 좋은 친구라 생각했다.
- 여보세요. 웬일이야?
- 뭐해?
- 나 작업하다가 방금 효진이 일 나가고 혼자 있는데. 너는? 거기 새벽이잖아.
- 우리 플랫에 사는 애가 3년 사귄 남자친구가 죽었다면서 막 울어.
헐 진짜?
감탄사에 가까운 반응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소현이 다음 말을 이어가기까지 하나의 초 단위조차 되지 않는 틈새에 ‘죽음’ ‘연인’ ‘시간’ 그리고 효진의 얼굴이 급하게 흘러갔다.
- 우리 플랫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말했지 않아? 거실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복도가 두 개 있는데 각 복도에 샤워 하나 부엌 하나 방 두 개가 있다고.
- 그래, 양쪽에 두 명씩 총 네 명이 산다고.
- 그래애. 그런데 애들이 거실에 잘 안 나온단 말이야. 난 나랑 같은 복도 쓰는 애가 중국인이 아니라 흑인이었다는 것도 지지난주에 알았다고. 아무튼 거실 항상 나 혼자 전세내고 공부하거든? 그런데 아까 한 시에 갑자기 금발 여자애가 울면서 저쪽 문에서 들어오는 거야. 제 다리에 걸려서 후들거리고 얼굴 가리고 엄청 서럽게 울어.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애가 뭔가 말하려나 싶다가도 또 숨넘어가게 우는 거야. 소파에 앉히고 물 한 잔 떠다 주고 진정시키니까 겨우 한 단어씩 말하는데……. 3년 사귄 남자친구가 죽었대.
- 어떻게 된 거래?
- 남자친구가 멕시코에 사는데 남자친구네 친구가 멕시코에서 전화를 걸었대. 죽었다고.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너무 진지해서 거듭 물어봤대. 진짜 얘 아까 울다가 실신하는 줄 알았어. 앰뷸런스 불러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니까. 아아 진짜 어떡해.
멕시코? 너무 멀다.
- 근데 왜 죽었대?
- 몰라. 병원이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그건 얘기 안 해줬대. 그래서 장난친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진짜라고. 그 친구도 자기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남자애네 가족한테도 연락 안 했는데 여친한테 먼저 연락했다고 그러더래.
- 여자애 캐나다 애야?
- 응, 캐나다 애야. 나 여기 세 달 살면서 얼굴도 이름도 오늘 처음 알았어. 심지어 나랑 같은 학교였어. 의류경영이래.
- 걔 오늘 가족이나 친구나 뭐 가까운 사람이랑 얘기하고 그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상실의 밤을 보낼 여자가 캐나다에 있다.
- 가족이랑 친구들은 다 덴버에 있대. 그래서 지금 나밖에 얘 달랠 사람이 없어. 집에 다른 애들은 없는 것 같고.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거실에 나와 있는 건 나뿐이니까.
- 걔 옆에 있는데 통화하는 거야?
- 아니, 아니. 걔 지금 방에 통화하러 들어가고 나 혼자 거실에 있어. 남자친구 친구가 다시 전화했나 봐.
- 진짜 어떡해.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여자는 왜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연인의 이름을 안고 밤을 보내야 한다.
- 몰라. 그러게 말야. 내가 다 미치겠어. 지금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 멕시코로 갈 수는 있나?
- 석사라 시험기간은 아닌데 뭐 할 건 있나 봐. 당장 내일부터 미팅 있고.
- 너는 할 건 없어?
- 나 사실 여름학기 과제 있는데……. 아, 쟤 다시 왔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멕시코는 너무 멀다.
일몰까지 꽤 시간이 남았는데도 비 때문에 방 안이 금방 어두워졌다. 다연은 책상 스탠드만 켜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종이는 비어있어 지울 것도 없건만 지우개만 만졌다. 효진은 손목의 파스가 보이지 않도록 소매 안으로 감추고 있을 것이다. 굳이 병원에 가지는 않겠다고 말했지만 잘 때 손목을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면 심상치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목과 잘 먹는 것은 크게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연은 ‘잘 먹고 다녀야지’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마른 연인은 귀찮다며 집에서는 뭘 통 먹지를 않았다. 내가 벌이가 심심해서 제대로 된 걸 못 먹여서, 하고 탓도 한다. 차라리 더 심해지기 전에 병원에 가 보아야 하나? 다연은 배가 고팠다. 그리고 쌀포대와 통장잔고와 스케치북이 빈 것을 보며 후 하고 한숨 한 번 내지르는 것이었다. 시선 닿는 곳마다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멕시코……. 하고 손톱을 깨물고 선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멕시코.
여섯 시간 후면 효진이 퇴근을 한다. 연인은 어차피 근무 시간에 연락을 못 하기 때문에 연락할 사람도 없어, 다연은 작업하는 동안 핸드폰은 무음으로 해놓곤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진동으로 해 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연은 스케치북에 곡선의 나체 둘을 얽게 그릴 생각을 했다. 태블릿은 나중에 켜기로 했다. 맨 종이에 첫 흑연 자국을 남긴 순간이었다. 진동이 울렸다. 소현의 문자였다.
‘남자친구 교통사고로 죽은 거래. 차에 치였나 봐. 여자애가 억지로 웃으면서 멕시코 가는 아침 비행기 구했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건너 방에 사는 다른 애도 소리 듣고 방에서 나와 갖고 셋이서 조금 얘기하다가 난 방금 방으로 들어왔어. 당황해서 급하게 전화 걸었는데 받아줘서 고마워. 내 얘기만 했네. 효진 언니 손목 아프다던 건 괜찮아?’
일러스트에서 보이는 불명확함이 질리도록 불명확하다는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다연은 효진에게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야 했다. 언니는 문자를 여섯 시간 뒤에나 볼 테지만, 나랑 지내는 게 가끔 미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언니를 너무 사랑해. 그리고 보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복면문학>이란 매주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익명으로 짧은 소설을 쓰고, 투표를 통해 한 작품에게 문학상을 수여하던 문학동인 무소속의 창작 독려 프로젝트입니다. 2015~2018년 사이에 썼던 작품을 퇴고해서 올리거나, 새로 집필해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