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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랭 Feb 16. 2022

19세기를 모르지만 빅토리아 시대는 좋아한 경우

자가 응시가 필요하다. 

아나 만졸리니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아나 만졸리니는 밀랍 해부 모형을 만드는 여성 기술자였다. 여성이 창작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만졸리니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만졸리니가 만든 모형들 중에서는 시신경과 안구 구조 모형이 있다. ‘당대 남성 시선을 분석하기위해 해부학적인 구조를 해명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라는 코멘터리가 있었다. 나는 어떤 시각기관을 해부해야 하려나. 해부구조를 안다고 해서 남성 시선이 해부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눈을 뽑고 의안을 넣어 돌아다니는 꿈을 꿨다. 한쪽은 완전히 도려내었고, 다른 쪽은 구체를 절반 남겨놨기때문에 시야가 유지되었다. 눈이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지는 않지만 꿈에서는 그랬다. 완전히 도려낸쪽에는 갈색 의안을 넣었고, 시야가 유지된 쪽에는 녹색 의안을 넣었다. 그래서 이 글을 써두기로 했다.



     어떤 아시안 청소년에게는 유럽이 판타지 세계로 기능할 수 있다. 이 유럽은 영국과 미국의 모호한 중간지대이며, 이따금 ‘베니스'나 ‘파리'따위로 불리지만 큰 차이는 없다. 빅토리아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창백한 신사들은 흐트러진 차림으로 해갈될 수 없는 정열을 곱씹는다. 여자들은 총명하고 그때문에 반쯤 미쳐있다. 열렬한 대화들이 오간다. 목조 저택의 그림자마다 비밀이 숨겨져있다. 연인들은 죽음을 맹세한다. 그들의 영혼은 천국과 지옥에서 거부되기에 자유를 얻는다. 눈을 찌르는 색은 없다. 흐린 날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풀이 우거진 묘지는 영감으로 가득찬다.

     이 청소년은 낭만주의 문학사조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 그러니까 빅토르 위고, 브론테 자매들과 메리 셸리의 글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무엇인지, 바이런형 히어로가 무엇인지, 여성주의 문학이 무엇이며 왜 발생했는지 설명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연관 검색어도 없던 시절 버지니아 울프나 실비아 플라스를 아주 느린 속도로 찾아 읽는 동안 에드거 앨런 포우와 오스카 와일드 전집을 독파했다.

     읽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었다. 이 청소년이 이 책들을 따라간 이유는 어쩌면 간단했다. 이 세계에 속한 감정들과 공명했다. 이 세계에서는 개인적인 감정들이 존재론적인 것들이었다. 깊은 열정을 따라가면 세계의 끝에 닿을 수 있었다. 인물들은 진실을 말할 줄 알았고, 스스로의 감정을 절절하게 인지했다. 광기로 좌절되는 순간에는 자연도 움직였다. 학교 성교육 시간에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않고 술집에서 일하다 인생을 망친 여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시간동안 듣고 있는 동안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머리털을 뽑히고 있었다.

     이 아시안 청소년은 빅토리아시대 영국 식민지배에 대해 모른다. 제인에어의 사촌이 인도로 선교를 가고, 버사 메이슨은 어떤 열대의 섬에서 왔다는 것 까지는 안다. 어떤 아이들은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식사가 커피 한 잔과 흑빵 한 조각이라는 것은 모른다. 산업혁명으로 기차들이 다닌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회주의 연구가 시작된다는 것도 모른다. 제인에어가 로체스터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정직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생각은 했어도, 로체스터가 제인에어에게 행사하려고 했던 권력의 위험은 알지못한다.


     그리고 이 빅토리아 영-미-불국에는 백인들만 있다는 것을 충분히 깊게 생각하지 못한다. 혹은 애매한 공백으로 남겨둔다. 아시안이 절대다수인 국가에서 살고 있으면 자신이 아시안이라는 생각은 안하게된다. 어쩌다 백인을 보아도 자신이 ‘백인'을 보는 것이지, 백인이 ‘아시아인'인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시아인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백인들의 세계에 아시아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도 알 수 없다. 톰 소여의 모험과 앵무새 죽이기를 읽어보았지만 - 토니 모리슨, 오드리 로드, 옥타비아 버틀러에게 보인 백인들을 알 지 못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아시안 여성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알 수 없다. ‘여성들이 스스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자립과 생활권 독립을 얻어야만 한다.’는 시대를 넘어서도 알아볼 수 있는 명제다. 그러나 울프가 말하는 당대의 여성들은 외국인 아시안 여성을 그들의 일원으로 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자신의 자리와 사랑을 찾아내지만, 버사 메이슨은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의 자아와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들에게 당신은 제대로된 인간조차 아닐 수 있다. 후기 식민주의 사회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이란 내가 안식과 동질감을 찾았던 세계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닳아가는 과정이다.



초등학교 발표 시간에 자신은 ‘꼭 서양사람과 결혼해서 쌍커풀이 있고 눈이 파란 아이들을 낳고싶다.’라고 한 학생이 있었다. 미형 만화체로 그려진 셜록홈즈 삽화를 좋아라한 학생이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셜록 홈즈는 이 그림보다는 나이가 들었고 코는 더 튀어나왔으며 이상한 사냥모자를 쓰고다닌다' 라고 해서 환상을 깨주었다. 그 친구의 욕망을 놀리는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한국인 여자와 백인 남자의 결혼생활에 대해 듣다보면, 가끔 그 친구가 정말 백인 남편을 만났을지 종종 궁금해한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 국제 결혼도 괜찮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본국에서는 별볼일 없는 남자가 영어와 백인선망을 등에 업고 결혼한 다음 한국인 아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이야기도 있다. 주관이 강한 백인여자들에게 주늑든 백인 남자들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동양인 여성들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평생 독일에서 결혼생활 유지하며 서로 독일어로 말했지만 집에서라도 한국어를 하고싶다는 아내의 말에 뒤늦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독일 남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자신의 동양적인 외모가 자식에게는 전해지지 않기 위해 백인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과 ‘나의 언어를 배울 생각이 없거나, 배우기 시작해도 서툴 배우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겠다. 그리고 나의 문화를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댁 식구들의 편견어린 시선을 감수하겠다. 내 가족이 내 배우자에게 서운함을 느끼면 해명은 나의 몫이라는 것을 납득하겠다. 내 아이가 내 언어를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중에 나와 대화가 안된다고 화내도 감수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다. 둘이 반드시 연결되지도 않는다. 관념적인 선망은 우연히 가질 수 있지만 인생을 살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긴 시간을 들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나 자신의 생각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포함된다. 결혼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한 사람으로서 감정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 친구도 그런 시간들을 가졌기를 바란다.


그래서 질문은 남는다. 나를 염두에조차 두지 않는 세계에 머물 이유가 있는가? 나는 이 세계를 간단하게 떠날 수 있는가? : 내가 안식을 찾았던 공간과 감정들을 부정하고 나는 어떤 새로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어쩌면 떠날 것 까지는 없다. 이 판타지의 유일한 청자는 줄곧 아시안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도 아닌 빅토리아 시대, 어느 하나의 나라조차 아닌 모호한 서양, 제도적인 모순과 식민주의 영향을 비껴간 인물들. 이 웃긴 파편들을 고르고 진열한 손은 꾸준히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나의 의도안에서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는 나의 욕망이었다. 이 배열은 내 욕망의 조감도다. 그들은 나를 모르나 나는 그렇게 그들을 세웠다. 이 시선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청소년기를 점유한 관념적인 얼굴들을 조금 좋아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제대로된 고증이 되지 않으면 되지 않은 대로, 지나치게 디테일한 부분은 디테일한대로. 다만 이제는 두 사람이 같이 쓰는 것이 될 것이다. 외로움과 욕망을 이리저리 섞어둔 청소년과 삶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는 성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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