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커의 즉흥적인 자기성찰 (1부)

keith jarrett. 미국. 줄리아드. 예일. 베토벤. 그리고..

by Joon Yoon 연준

키스 제렛(Keith Jarrett)의 쾰른 실황 앨범을 들으며 새해를 맞아 즉흥적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클래식 음악 세상에만 갖혀 있었던 난, 다른 장르의 음악은 하등시하는 그런 못 된 태도를 갖고 지내왔었다.


나에게 피아니스트란 머레이 페라이아, 안드라스 쉬프, 크리스티안 짐머만, 알프레드 브렌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정석이었고, 정답이었다.

쇼팽의 뱃노래를 열한살의 나이에 그냥 쳐나갔다. 그 어린 나이에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부모님을 따라 예원학교에서의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 교육 틀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 갔다.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의 세상에 발을 들였던 아이들에서 벗어나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전형적인 미국 중고등학교의 그런 환경에 던져졌다.


아홉살 때 미국에 (그때도 부모님을 따라) 일 년 있으며 서툴게나마 영어를 몸으로 배웠다. 그게 물론 도움이 됐겠지.

그래도 갑작스런 변화는 나를 내성적인 아이로 만들어 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무엇에 열정적이고 나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하는 그런게 무엇인지 그닥 관심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쳐오던 모짜르트 소나타, 쇼팽 연습곡, 바하 인벤션, 이런 저런 브람스, 리스트, 차이콥스키, 베토벤의 곡을 주어지는대로 쳐가긴 했다. 그래, 피아노를 쳤다.

음악이라는 언어로 소통하는 건 별 관심 없었던 듯 하다.


마음 한켠 계속 두려움이 잠재해 있었다. 무대 오르는 것이 항상 두려웠고 피아노를 친다는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 보다는 싫증이 났다. 그래도 계속 해왔다. 내가 잘 할 수 있는건 이거 밖에 없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가야 할 청소년 시기에 그렇게 하지도 못한 것 같다. 20대에 들어서고 뒤늦게 책에 빠지게 됐다. 그렇기에 내 주장을 명확히 표현 할 줄 몰랐고,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음악이라는 언어는 내게 어떤 존재인가 파헤쳐 보기보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쌓여 써내려진 음을 하나 하나 쳐나가기만 했다. 사춘기 시절 내겐 어머니와도 같은 분인 볼티모어 피바디 음악원 문용희 선생님께서 항상 나를 일께우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은 심하게 막혀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런 분이 내 삶에 있다는 건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한 일이다.


음을 하나하나 쳐나가며,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잘 몰라도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니 좋은 대학 입학, 그리고 쇼팽콩쿨을 목표로, 차이콥스키 콩쿨을 목표로, 살아왔다. 어쩌다 그 유명한 줄리아드 음악원도, 그럴싸해 보이는 명문 예일대학교 음악대학도 다녀 보았다. 참 운이 좋았던 듯 하다. 어떻게 또 그 비싼 미국 학교를 학비 들이지 않고 다녔다. 그 학비를 감당 할 수 없었겠으니 이름 좋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겠지..


뉴욕이라는 도시에 첫발을 내디뎠을 땐 위대한 개츠비처럼 꿈에 부풀어 있었다. 줄리아드라는 곳은 꿈의 학교였고 타임스퀘어는 나를 설레게 했으며 (물론 지금은 뉴욕에서 가장 기피하는 곳 이다ㅎㅎ) 바쁜 뉴요커의 삶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페라이아, 쉬프, 폴리니,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 클래식계가 꿈꾸는 명성 가득한 존재들이 걸어서 20분이면 닿을 장소에서 집 드나들듯이 공연을 하고 마스터클래스(공개레슨)을 했다. 그런 분들에게 마스터클래스를 받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으며 일생일대의 가르침이었다. 베토벤과 바하는 섬김의 대상이었고, 그분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연주가들의 말씀과 해석은 정답이라 여겼다. 그런데 왜요? 라고 질문 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위대함의 무게에 내게 진정 기쁨을 주고 가볍에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 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분들의 말은 답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 세계에서 인정 받으려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은 무의식 속에 항상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평론가 이동진의 추천 도서 500을 살피는 중 유난히 내 이목을 사로잡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의 제목이 마음에 들어 내가 최애하는 밀란 쿤데라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됐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부 8장에서 쿤데라는 베토벤의 숙명적 어구 muss es sein? Es muss sein!에 대해 써내려간다. 이 어구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 Op.135 마지막 악장의 도입부 모티브(곡을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와도 같은 것)의 영감으로 쓰인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은 감히 의문 조차 던질 수 없는 그런 위용을 가진 엄청나게 진지하고 철학적인 것들로 간주 된다. 근데 꼭 그래야만 하는가? 그의 숙명적인 어구의 출처는 이렇다 한다: 돈에 궁핍하던 베토벤은 뎀셔라는 오스트리아 관료가 자신에게 빛진 돈을 갚으라 독촉하자, 뎀셔가 “그래야만 하는가?”라 답한 것에 베토벤 자신이 “그래야만 한다!”라고 답 했다. 이 얼마나 진지함과는 멀리 있는 것에서 베토벤의 후기 작품을 대변하는 어구와 모티프가 탄생했는지 보면 허무한 웃음이 나온다.


순진무구하게 섬겨 온 이들의 위대함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도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 존경스럽다. 그들도 자신이 신으로 받을여지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종말론과 자신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음을 믿은 스크리아빈​과 같은 이는 제외일수도 ㅎㅎ)


뉴욕에서의 생활이 진지함으로만 채워 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West 32가 브로드웨이와 5번 에버뉴 사이 K-Town(한인타운) 빼곡히 집성촌 처럼 모여있는 우리집, 테이크32, 북창동 순두부, 큰집, 포차32,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나의 최애 식당 아리랑 등 고국을 상기해 준 곳 수많은 소주병 속 내 영혼 일부분을 묻어 두고 오기도 했다.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 탓에 맨하탄 북쪽 끝자락의 washington heights부터 뉴욕대가 있는 남쪽의 소호, 그리고 간혹 넘나 들었던 브룩클린에서의 파티들이 떠오른다. 영혼을 묻기까진 않았지만 나의 흔적을 여기저기 남겨두고 온 것 이겠지.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뉴욕 생활을 시작하며 한번 뉴요커는 되면 평생 뉴요커가 될거라는 이상한 집착을 했다. 뉴욕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 거대한 도시에 블랙홀 같이 빨려들어갔다. 나를 집착하게 만드는 여자친구와도 비슷한걸까.. (이것도 운이 좋게 직접 경험 해 보지는 않았다!) 나를 뉴욕과 갈라 놓은 건 자의 반 타의 반 이었다. 애석하게도 석사 오디션은 그닥 잘 풀리지 않아 전만큼 장학금이 나오지 않았다. 근데 왠걸, 모든 입학생에게 전액 장학금과 소정의 생활비까지 주는 예일 음악대학에서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근데도 고민했다. 배부른 소리지만 뉴욕에서의 줄리아드 생활을 접는다는 건 나를 져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꼴에 고민한다고 폼잡으며 West 65가와 브로드웨이 에버뉴 앞 링컨센터를 거닐며 전에는 피지도 않던 담배를 한낮에 물기도 했다. 참 볼썽 사나운 장면이다. 웃픈 장면 속 고민 끝에 패배를 인정하며 뉴헤이븐의 예일 대학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뜻하지 않았던 곳으로 가게 됐다.


뉴욕을 막상 떠나고 보니 홀가분했다. 그 혼란스러운 곳을 떠나게 된 것에 감사했다. 뉴욕에 몸 담았을 때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지만 몸 상태가 대변 해 준 듯 하다. 파릇한 일학년 때의 짜릿함과 즐거움을 제외하고 보면, 불안감에 지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항상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대학생활의 오랜 친구, 술 덕택도 있었겠지만 ㅎㅎ) 물론! 소중한 친구들, 선생님, 그리고 창의적인, 그리고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이들을 만났던 것에 감사하다. 스티비 원더, 모짜르트의 천재성, 그리고 영혼을 가진 그래미 역사상 최대 노미네이트에 빛나는 존 바티스트(존의 NPR 타이니 데스크 공연​) 와의 몇번의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존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웃음소리와 말투는 언제나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는 항상 햇빛과도 같은 천생 예술가였다. 재즈 음악가지만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도 잘 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음악이라는 언어로 소통하고 창의적인 것을 뿜어내고 싶어했던 이들은 항상 주변에 있었다. 내 의지가 거기에 없었던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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