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의,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이거다 싶었다. 하는 행동마다 왜 해야 하는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며 씁쓸하게 자문하던 시기에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카뮈와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었다. 내면에서 일어나던 무형의 춤사위가 책을 읽으며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지금껏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던 내밀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실존의 문제를 카뮈가 나를 위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짜릿했다.
교사가 된 지 8년 차. 나름 수업에도 재미를 붙이고 시도 써보며 교사로서의 삶을 잘 풀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수업에 대한 압박감도 꽤 컸고 행정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건강도 꽤 나빠졌다. 이래저래 버거웠던 모양이다.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만성 번아웃을 습관처럼 느끼며 살지 않았나 싶다. 더 생각해 보면 사실 교사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랬던 것도 같다. 카뮈의 말처럼 그렇게 점점 세계가 두꺼워지고 낯설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왜?"라는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를 느꼈고, 이는 자연스럽게 "왜 살지?"라는 존재를 흔드는 멀미 나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죽음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종종 생각하며 지냈다. 어려운 책이다. 책이 쉽게 읽기지는 않지만 곱씹을수록 카뮈의 문장과 논리는 시적이며 감동적이다. 어느 때보다도 책을 읽으며 줄을 긋고 메모하며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읽었다. 책을 읽는 느낌보다 공부하는 느낌으로 읽었는데 그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카뮈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부조리'이다. 부조리. 단어 그래도 조리가 없음, 조리가 부재한 상태를 말한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책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인간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본질적인 욕구와, 그에 부응하지 않는 세상의 무의미함, 혼돈, 불합리성 사이의 충돌’ 정도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살면서 우주의 근원, 삶의 의미, 절대 순수, 자연법칙, 신의 계획 같이 세상을 관통하는 본질과 특정한 원리로 세상을 이해하고 길을 찾으려 하지만 이 세상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 말은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한 세상과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과 세상 사이의 부조리는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나는 누구나 이런 부조리를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뿐.)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의 감정으로 우린 세계에 대해 '낯섦'을 느끼고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갖는 생각과 내가 그 생각에 부여하려는 내용 사이에 가로놓인 메꿔지지 않는 단절을 느끼며 나는 결국 '이방인'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어 관련한 철학자들을 언급한다. (이 부분이 조금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으나 나는 나름 재미있게 봤다.) 그중 '키에르케고르'라는 인물에 대해 카뮈는 그의 생애를 "부조리를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몸소 부조리를 산다.(46쪽)"고 평가하며 그가 한 말 "침묵 중에서 가장 확실한 침묵은 무언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46쪽)"을 인용하며 그의 철학을 아주 흥미롭게 다룬다. (여담이지만 키에르케고르에 흥미가 생겨 아내와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아내는 키에르케고르 신학적인 부분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 그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카뮈는 부조리를 해소하는 방법, 부조리를 대하는 자세로 크게 3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자살이고, 두 번째는 희망, 세 번째는 반항이다. 우선 부조리를 해소하는 육체적 자살이다. 어차피 유한한 세계, 우리는 모든 시간을 떠안고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이므로 그 죽음을 조금 당겨서 삶을 마감해 버리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다만 카뮈는 이에 대해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85쪽)"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논리가 흥미롭다. 자살은 부조리를 해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조리를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행위로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부조리라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간극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방정식의 한쪽 항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오히려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뒷걸음질 치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결국 카뮈의 자살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만약 의식에 의하여 백일하에 드러난 부조리를 자신의 눈앞에 지탱시키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희망, 희망은 대게 긍정적이고 밝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다르다. 카뮈는 이 희망을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22쪽)"이라고 이야기한다. 주로 이를 강요된 희망으로 표현하며 주로 종교적인 내용으로 전개된다. 카뮈는 논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조리를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이 논리적 차원에서 '비약'이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부조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세계 안에서만 존재하고 그 개념이 영원성으로 가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통찰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고 결국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부조리에 대한 투쟁은 결국 회피되는 것이라는 기가 막힌 논리를 편다.
마지막으로 '반항'이다. 카뮈는 반항이라는 거부 행위는 앞서 언급했던 '자살', '희망'과 같은 '포기'행위의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결국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부조리를 견지하며 사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반항, 자유, 열정이라는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내며 자신이 왜 자살을 거부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뒤에 이어질 '시지프 신화'와 연결된다.
시지프는 신들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고통스러운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큼 인간에게 큰 고통은 없다. 정말 끔찍하다.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 되풀이하는 고통, 측량할 수 없는 고통 끝에 목표를 달성하지만 순식간에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바라보는 시지프.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다시 정상을 향해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운명.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반복되는 일상의 삶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카뮈는 그 과정에서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잠시 휴지의 순간에 주목하며 결국 습관이 아닌 '의식'과 '사고'가 고개를 두는 순간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카뮈는 "시지프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그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182쪽)", "어떤 날들에는 시지프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산을 내려오지만 그는 또한 기쁨 속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183쪽)"라고 이야기하며 시지프의 행위에서 '고귀한 성실성'을 발견한다. 결국 우리는 부조리함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라정리할 수 있겠다.
생의 결론은 부조리를 온전히 안고 반항하며 살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