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도 쓰는 멀티플레이어
‘어공’이 하는 일을 말하기 전에 '늘공'이 하는 일부터 말해야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각종 인허가나 민원 서류 떼는 일은 정말 극히 일부다. 10년간 가까이서 봐온 바로는 소방, 경찰, 교사, 운동선수, 연예인과 예술가 등의 일을 빼고는 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은 드물다.
그 많은 업무 중 ‘어공’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의 일을 한다. 예를 들면 보건소 의사, 행정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행정 기록을 위한 사진작가, 문화재를 관리하는 학예사, 도서관 사서, 교통전문가, 체육지도자 등등 정말 다양하다.
실제 ‘어공’들 중에는 그 표현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경계를 느껴서인지, 어투의 문제인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단어가 좋다. 재미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는 게 최선인 이 현실 직업의 세계에서, 좀 색다르게 불리는 재미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그냥 공무원이 아닌 어쩌다 공무원이라니. 무언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공직 입직 후 첫 업무는 ‘홍보기획 담당’이었다. 지금이야 ‘충주맨’처럼 행정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홍보에 다양한 채널을 활용하지만, 10년 전 행정이 할 수 있는 홍보 수단은 신문‧방송, 종이 홍보물 제작 정도였다. 방송작가였던 나의 경력이 어필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4년 넘게 홍보기획자의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 가장 많이 한 일은 글쓰기였다. 단체장의 방송대담 원고 작성과 신문사 인터뷰 답변 작성, 대규모 행사 인사말 작성, 소식지 기사 작성, 중요한 정책의 보도자료 작성 같은 것들.
시간이 지나고 ‘그 직원 글 좀 쓰더라’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어떤 때는 현수막 문구 작성까지 내게로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기야 내 업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일이 있었다.
평소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던 상사에게 전화가 온 날이었다. (지나고 보니 내 능력을 대놓고 지속적으로 칭찬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더라...)
“짱니 씨, 지난주에 00국장님(시청 내 서열 3인자) 아들 결혼식 있었잖아,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신다네. 짱니 씨가 글 좀 멋지게 써 줘봐”
“네? 제가요? 제 가족도 아니고, 저는 그 분 잘 몰라서 결혼식에 가지도 않았는데요. 제가 쓰는 것 아닌 것 같아요.”
“짱니 씨가 뭘 모르네. 한 직장에서 일하면 다 가족이야. 가족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줘야지”
공직 문화가 유독 가족적인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가족이라니.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진 그 생각의 단호함이 짧은 말에서 강하게 전해졌다. 생각을 넘어 신념이 되면 바꾸기란 쉽지 않다. 나는 더 설득하지 않았다. ‘해 줘 버리고 말자’로 나를 설득하는 게 더 빨랐다.
그렇게 당시에는 매일 경계없는 글만 쓰니 무척 힘들었지만 오히려 단순해서 좋았던 것 같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말이다.
5년 전 수도권 한 도시에 있는 구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보도담당’으로 불린다. ‘보도’라는 그럴싸한 말이 업무에 무게감을 더하지만, 사실 가끔 헷갈린다. 방송작가 때로 돌아간 느낌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 일맥상통한다. 인생은 직선이 아닌 원인가 보다. 아직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인데 돌고 돈다.
현재 나는, 시청에서 하던 글 쓰는 일에 더해서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홍보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한다. 매일 출근해 수많은 사업 중 홍보거리를 찾아내고, 내부 취재를 해 보도자료를 쓰고, 그 사업을 언론에서 다루기 쉽게 현장 사례를 찾는다. 더 풍성한 기사가 나올 수 있게 취재를 돕고 때로는 주민을 대신해 신문이나 방송에 출연도 한다. 글도 쓰고 현장도 뛴다.
덕분에 늘어난 게 많다. 임기응변이 늘고, 캐묻기가 늘고, 너스레가 늘었으며, 전투력이 늘었다. 능력치가 늘어난 건 좋은데, 그만큼 소진도 빨랐다. ‘어공’이 가진 여러 한계를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어공'으로 지내면서 조금씩 소진된 나를 채우기 위해 최근 혼자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군분투 내 치유의 과정을 어딘가에 남기고 싶었다. 내가 이곳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는 이유이다.
글 쓰는 ‘어공’의 치유의 책 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