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아해 Aug 03. 2023

가스레인지가 깨끗해야 일이 잘 풀린대

음식을 만드는 공간에 대하여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그날의 주제는 청소였다.

  “화장실 청소하면 긴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이거 다 내 머리 아니잖아. 그런데 왜 내가 치우고 있냐고.”

  “그래도 너는 화장실만 치우잖냐. 나는 화장실 청소에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린단 말이야.”

  “저는 그것도 다 하고 빨래랑 요리도 하는데요?”

 

  불평의 흐름을 끊고 J가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 아내를 위해서 청소든 뭐든 거의 다 하고 있어.”

  사람들은 그의 당당함에 솔깃해져 귀를 기울였다.

  “예를 들면요?”

  “가스레인지 알지? 우리 엄마가 그거 엄청 신경 쓰거든. 가스레인지가 깨끗해야 바깥사람 일이 잘 풀린다고. 우리 집에 오시면 가장 먼저 가스레인지 바닥을 손으로 문질러 보셔. 기름때가 꼈나 안 꼈나 확인하는 거지.”

  손가락 두 개로 식탁을 문지른 뒤 우리에게 들어 보이며 J가 말했다.

  “어우, 벌써부터 숨 막힌다.”

  “그래서! 내가 그걸 아주 윤이 나게 반짝반짝 닦는다 이거야.”

  J의 얼굴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아내를 위하는 일이에요?”

  “가스레인지가 더러우면 엄마가 아내한테 눈치를 주거든. 바깥사람 일 망칠 일 있냐고 잔소리하셔. 아내는 가스레인지 관리에 별로 신경을 안 쓰니까 매번 혼나. 그래서 내가 혼날 일 없게 하려고 미리 청소하는 거야.”

  이제 J는 어서 자기를 칭찬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뒤를 이어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 주지 않는 아내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날 이후 “가스레인지가 깨끗하면 바깥사람 일이 잘 풀린대.”라는 말이 내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 말은 반대로 가스레인지가 더러우면 바깥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미신처럼 들리기도 했다. 바깥사람은 도대체 누굴 의미하는 것일까. 전통적인 관점에 따라 바깥일을 하는 남편을 말하는 것일까. 바깥일이 기준이라면 맞벌이 부부는 둘 다 바깥 사람인 것인가. 가스레인지 청소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의도는 뭘까. 가스레인지를 닦을 때마다 질문이 떠올랐고 꼬일 대로 꼬인 답이 이어졌다.        


  남편의 요리 철학은 ‘재료는 듬뿍, 양념은 과하게 기름은 많이!’이다. 남편이 요리를 할 때면 사방팔방으로 온갖 양념과 기름이 튀기 마련이다. 가스레인지는 물론이고 주변 식기들까지 번들번들 거린다. 게다가 불맛을 입히는 걸 좋아하여 요리에 자주 화염방사를 끼얹곤 하는데 그 불길이 위로 치솟아 렌지 후드가 그을리기 일쑤다.


  그가 빠져나가고 난 뒤의 주방은 소란스럽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포개어 정리한다. 따뜻한 물에 행주를 빨고 물기를 꾹 짜낸다. 기름때는 따뜻한 온도에서 제거가 잘 되기 때문이다. 가스레인지를 닦기 위해 행주를 집어드는 순간 ‘가스레인지가 깨끗해야 바깥사람 일이 잘 풀린대.’가 떠오른다. 미간이 좁혀진다. ‘그냥 지저분하니까 닦는 건데 꼭 누군가를 공양하기 위한 일 같잖아.’ 행주를 집어든 손이 멈칫거렸다.    

  

  등 뒤로 아이가 다가와 말했다.

  “엄마 우리 집은 균형이 잘 맞는 것 같아.”

  “응? 왜?”

  “아빠는 짜고 매운데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잖아. 근데 계속 먹으면 뚱땡이가 되고 맛있는 줄도 모르게 될 거 아냐. 엄마는 짠 음식을 안 좋아해서 평소에 담백하게 만들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건강하게 맛있는 걸 계속 먹을 수 있어.”

  “음,,, 아빠 음식이 더 맛있다는 소리구나?”

  “음,,, 그건 그래.”

  “뭐라고?”

  도망가는 아이를 잡으러 간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스레인지를 바라본다. 이대로 놔두면 기름이 굳고 먼지가 달라붙어 끈적끈적해질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드는 곳인데 지저분한 주방은 위생에 좋지 못하다. 무엇보다 요리할 맛이 나지 않는다. 요리를 하는 일도, 주방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도, 우리가 함께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하는 일이지 않을까. 적어도 내게 주방은 바깥사람이 잘되길 바라는 미신의 공간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면 좋겠다.      


  미신이라는 단어는 미혹할 ‘미’에 믿을 ‘신’ 자를 쓴다. 부부 중에서 누가 바깥이고 누가 안이냐며 중요하지도 않은 부분에 홀릴뻔했다. 미신이든 뭐든 이 공간은 원래 깨끗해야 하는 곳이다. 이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재료는 듬뿍, 양념은 과하게 기름은 많이!’ 침이 고인다. 충분히 더 미혹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이드미러를 보고 싶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