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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해 Jul 03. 2023

사이드미러를 보고 싶어요

곁에 없어서 알게 되는 것

    좋아하는 교수님의 지방 강연 소식을 접했다. 수강 신청을 했고 외출 일정을 잡았다. 십 분만 미리 준비하면 되는데 꼭 다른 일을 하다가 시간에 쫓긴다. 남편은 자주 내게 불만을 표현한다.

  “너는 네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과대평가해. 우선순위를 정해서 처리해야지. 이것저것 하다가 마지막에는 꼭 불안하게 허둥지둥거려.”

  이 말에는 서두르다 다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겼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또 늦어버렸고 10시에 강연이 시작하는데 9시 30분에 출발했다. 운이 좋으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데 퍽!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왼쪽 기둥을 미처 보지 못하고 서두르는 바람에 사이드미러가 부서진 소리였다. 다행히도 거울은 깨지지 않고 고대로 떨어져 나왔다. 다시 끼워보려고 애를 썼지만 불량 지폐를 뱉어내는 자판기처럼 사이드미러는 자꾸 거울을 밀어냈다. ‘조심히 거울을 얹은 채로 운전을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남편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너의 능력을 과대평가해.’ 이런 정확한 사람... 그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가까운 공업사에 전화했다.

  “일단 부품은 있구요. 교체하면 7만 원 정도 들어요. 11시 전까지는 오셔야 해요.”

  강연은 포기해야 했다. 왼쪽 사이드미러를 접고 운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이드미러도 안 보고 다니는 미친 운전자로 보이면 어떡하지?’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면 옆 차가 창문을 내리고 사이드미러를 펴라고 지적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네 저도 사이드미러를 보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하며 빠진 거울을 어색한 미소와 함께 들어 보일 수 있도록.


  백미러를 활용해 운전하 했지만 사이드미러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내 바로 옆을 볼 수가 없어서 사각지대가 실시간으로 만들어졌다. 습관적으로 거울을 볼 때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아찔한 마음이 철렁거렸다. 사이드미러를 접고 다니는 운전자는 확실히 미친 사람이거나 최소한 부주의한 사람이라는 걸 몸소 체험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공업사에 도착했다. 사장님께서는 비뚤어진 겉 커버부터 제대로 맞춰 조립해 주셨다. 힘을 주어 거울을 몇 번 꾹꾹 누르시더니 완벽하게 끼워주셨다. 씨익 웃으시며 뒤돌아가는 사장님을 쫓아가자,

  “그냥 가시면 돼요.”

  라고 답하셨다. 7만 원을 벌었고 시간도 벌었으며 무엇보다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강연은 이미 시작해 버렸고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지금 갈게.”

  “일찍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게 와?”

  “사정이 생겨서,,, 같이 점심 먹을까?”

  엄마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두 팔을 벌려 다가오셨다. 항상 ‘우리 손자 어서 와.’하며 내 아이들을 안아주셨는데 이번에는 “우리 딸 어서 와.”하고 나를 안아주셨다. 전에 없던 일이라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내 엄마에게 안겨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엄마 냄새가 났다.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 집 냄새라고 표현하는 엄마 냄새. 포근한 이 냄새를 맡아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집을 나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출장이 있어서.’ ‘약속에 늦어서.’라는 이유로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창문 너머로 인사했던 적이 대부분이었다. 분만 서둘렀으면 다정하게 인사할 수 있었을텐데. 괜히 미안하고 울컥해져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꾹 참았다. 아무래도 오전에 있었던 가벼운 사고가 나를 쫄보로 만들었나 보다.      


  점심으로 비빔냉면을 만들어 먹자고 하셨다. 그냥 대충 먹자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과, 마늘, 양파, 레몬을 믹서기에 가셨다. 자꾸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는 엄마를 보다가

  “엄마, 여기 냉장고에 비빔장 있네. 이걸로 먹자.”

  “왜? 엄마가 만든 양념이 맛 없을까 봐 그래?”

  “아니! 만드는 거 귀찮을까 봐 그렇지.”

  “딸이 먹는 건데 하나도 안 귀찮아.”

  그냥 엄마의 수고로움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으면 됐는데, 엄마의 사랑을 귀찮음이라는 단어로 깎아내린 것 같아 뜨끔했다. 다음에는 돌려 말하지 않고 “엄마 고마워요.”라고 말해야지.     


  점심을 먹고 거실 바닥에 누우니 잠이 솔솔 왔다. 엄마는 내 다리 쪽으로 선풍기를 틀어주셨고 몇 번이고 바람 세기는 괜찮은지 춥거나 덥진 않은지 확인하셨다. 한숨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니 엄마는 식탁에서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계셨다.

  “엄마, 당근이 눈에 좋다고 당근을 볶아 먹을 게 아니라, 유튜브부터 큰 화면으로 봐. 조그만 핸드폰으로 보니까 눈이 당연히 아프지!”

  “아이고, 맞네 맞아.”

  아... 나는 왜 이럴까. “엄마 눈 건강이 걱정돼요.”라고 말하면 되는 것을. 엄마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내 곁에서 없어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곁에 있는 것은 곁에 없을 때 가장 절실해진다. 문제는 있을 때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다가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뒤늦은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사이드미러가 부서지고서야 그 필요성을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내 곁의 좋은 사람들에게도 ‘곁에 없어서 보고 싶어’가 아니라 ‘곁에 있어서 고마워’를 말하고 싶은데, 이 마음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니 지금, 곁에 있어서 고맙다고 다정한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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