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은 지 이 주쯤 되었다. 처음에는 찬물에서 따뜻한 물로 바뀌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는데,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운 물만 나온다. 샴푸를 머리에 벅벅 문지르며 생각한다.
‘아까 미적지근한 물 나왔을 때 빨리 씻을걸. 지금은 너무 차갑잖아.’
머리를 헹구는 동안 물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아직 씻지 않은 몸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샤워기를 몸 쪽으로 돌렸다. 찬물은 순식간에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뱉어내는 숨 속의 온기마저 아까운지, 저절로 숨이 막혔다.
‘오늘은 진짜 보일러 AS 불러야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샤워를 마쳤다.
처음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땐,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됐다. 찬물이 따뜻한 물로 바뀌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씻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어는 순간, 아무리 기다려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보일러에서 각 방으로 온수를 분배하는데요. 통신에 오류가 생긴 것 같아요. 이럴 땐 보일러 전원을 끄고 5분 뒤에 실행하면, 초기화되면서 오류가 해결되기도 해요. 그렇게 한 번 해보시겠어요? 아니면 바로 출장 접수를 해드릴까요? 기사님이 방문하면 고장이 아니어도 출장비는 부담하셔야 해요.”
출장비의 장벽은 높았다. 얼마나 나올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보일러 수리비의 장벽은 더 높았다.
“아... 일단 전원 끄고 초기화부터 해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안내받은 대로 전원을 껐다 켜자, 마법처럼 따뜻한 물이 나왔다.
‘보일러 상담센터 만만세!’
수리비 몇십만 원을 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틀 뒤, 보일러는 또 찬물만 뱉어냈다. 전원을 껐다 켰고, 또 다음날, 또 찬물만 나오자, 또 전원을 껐다 켰다. 따뜻한 물은 어떨 때는 빨리, 어떨 때는 애태우듯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따뜻한 물은 파업에라도 들어간 듯 감감무소식이었다. 보일러를 껐다 켜도, 콘센트까지 잡아 뽑아봐도 반응이 없었다. 샤워실과 보일러실 사이를 물 발자국을 찍으며 왔다 갔다 하길 여러 번, 시간에 쫓겨 찬물로 온몸을 씻은 그날, 바들바들 떨며 AS 출장을 접수했다.
출장 기사님은 그날 오후에 바로 와주셨다.
“보일러 메인 보드가 고장 났네요. 본체 열어서 빨리 교체해 드릴게요.”
“교체 비용은 얼마일까요?”
“고객님께서 부담하실 비용은 없어요. 임대 아파트여서 회사에 청구할 거거든요.”
“아... ”
“수리 비용은 집주인한테 청구하는데, 임대 아파트는 집주인이 회사인 거잖아요. 고객님 과실만 아니면 수리는 회사가 해요.”
“알았으면 더 빨리 고칠걸 그랬네요.”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아서 생기는 이득이라니,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이전 직장으로 발령받기 전, 인터넷에 학교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관련 기사들 가운데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으니 [OO초등학교 임대 아파트 공동 학군 지정 반대로 갈등]이었다. 그 학교는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를 위해 개교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설 학교였다. 학교 주변으로 아파트 단지는 쑥쑥 들어섰다. 마치 잭과 콩나무의 마법 나무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가는 게 콩나물 같기도 했고 아파트 값이 매일매일 치솟는 게 마법 같기도 했으니까.
아파트 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서기 전, 그곳에서 이미 살고 있던 원룸과 주택단지는 OO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가 OO학교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빼곡하게 올라가는 아파트 숲 중에는 임대 아파트도 끼어있었다. 15 학급으로 개교했던 그 학교는 5년 만에 52 학급으로 늘어났고 짧은 시간 동안 몸통을 불리느라 학교도 진통을 겪었다. 한 반에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채웠고 체육 시간이면 강당을 반으로 나누어 2개 학급이 동시에 수업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임대아파트 학생들은 오지 말라고 소리 높였던 건.
어른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학교 앞 울타리에는 [임대아파트 공동 학군 지정 결사반대!] 같은 플래카드가 걸렸고 전단지도 여기저기 붙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그러건 말건 관심 없어 보였다.
정말 그랬을까.
한 번은 우리 반 지아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기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현이는 장난기가 많았지만 적절한 선을 지킬 줄 아는 아이였다. 다만 수학을 많이 어려워해서 지아가 한 번씩 숙제를 도와주곤 했다.
“기현이? 기현이 착하고 재밌는 친구지. 지아가 보기엔 어떤데? 공부를 좀 더 하긴 해야 해. 그치?”
“선생님 저 기현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흐억, 진짜? 기현이가 왜 좋은데?”
“저번에 제가 우유를 엎어버렸잖아요. 기현이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닦아주더라고요. 진짜 착하지 않아요?”
“맞아. 기현이가 그때 아무 소리 없이 묵묵히 치우더라. 선생님도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어. 지아, 너 보는 눈이 있는데?”
지아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씨익 웃었고 팔랑 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지아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경을 치지 않을까.’ ‘지아는 모범생에 성실하고 예쁘고 착한 아이인데, 뭐가 아쉬워서 기현이를 좋아하지?’ ‘가만, 기현이는 임대 아파트 살지 않나? 집안이 서로 어울리나?’ 같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언제부터 집이 사람을 대신하기 시작했나.
언제부터 집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투자의 수단이 됐나.
집은 살아가는 곳이고 사이를 만드는 곳이면 좋겠다. 집에 머무는 사이, 집에서 함께 하는 우리 사이, 그 사이사이에 빼곡한 이야기를 가득 채우며 자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때론 틈을 만들고 때론 틈을 채우는 그런 곳이었으면,
그래서 내 소원은 ‘집의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