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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줍고 나누고  

전라북도 익산시 주공아파트

by 좋아해 Mar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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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을 시작했던 원룸, 첫 아이를 낳고 길렀던 무주 관사를 떠나, 세 번째 우리 집은 꼭대기 층이 5층인 주공아파트였다.

  

  주공아파트는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건설한 공공 임대아파트다. 이후 주공아파트는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고 외관도 달라졌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여전히 ‘저렴한 곳’이었다. 집값이 저렴했을 뿐인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마저 저렴하게 여겨지는 일이 종종, 자주, 왕왕 있었다.  


  남편이 복싱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체육관에서 집 주소를 적자, 아랫사람 대하듯 반말이 돌아왔다고 했다. 존댓말을 하다가 반말을 시작한다거나, 갑자기 옷이나 외모를 평가한다거나, 뭘 모른다는 식으로 가르치려는 말투와 은근히 무시하는 말투들. 우연이거나 착각이겠거니 여겼던 일은 이상하게도 집 주소가 밝혀지면 생겨났다. 우리는 조금씩 예민하게 가시를 세웠고 그 가시는 서로를 겨누며 상처를 만들기도 했다.  


  각자의 가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였을까. 잊을만하면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생겼다. 아랫집은 자주 소리 높여 싸웠는데 그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경찰이 출동하곤 했다. 티브이나 컴퓨터가 베란다 밖으로 던져지기도 했고 “살려주세요!”라는 비명 소리에 화들짝 놀라 112에 신고를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분리수거용 박스를 문 앞에 내놓았는데, 버리려고 보니 그 안에 김치찌개가 들어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분리수거함을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착각한 걸까?”

  “그냥 박스잖아. 전혀 쓰레기통처럼 보이지 않은데?”

  “속이 안 좋아서 토한 걸 수도 있어!”

  “음... 그렇기엔 상태가 너무 멀쩡해. 냄새도 그렇고 이건 그냥 김치찌개야.”

  “음식물 내다 버리기 귀찮아서 여기에 버렸나?”

  “굳이 5층까지 올라와서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정답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사건은 꼭 안 좋은 일만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이 난장판이다.

  ‘도둑이 들었구나!’

  그런데 이상했다. 도둑이라면 서랍을 죄다 열어서 귀중품을 가져가야 마땅한데, 서랍이 얌전히 닫혀있었다. 지갑도 그대로, 현금도 그대로, 아기 돌반지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물건을 뒤진 게 아니라 물건이 죄다 아래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떨어진 물건을 정리하는데 우리 집 고양이 포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순간 번뜩 떠오른 얼굴이 하나 있었으니, 하얀 얼굴에 캐러멜 소스가 묻은 듯한 점을 가진 길고양이었다. 도둑이 든 게 아니라 고양이가 들었던 거다.


  우리 옆집에는 젊은 여성이 살았다. 그녀는 길고양이에게 친절했다. 어떻게 정을 나눴는지 고양이들은 5층까지 계단을 올라와 밥을 먹고 가곤 했다. 쫄래쫄래 뒤 따라 오르던 캐러멜 소스 고양이가 있었고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쏙 들어갔다 나오는 회색 고양이도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덜 닫힌 우리 집에 놀러(?) 왔고 겁에 질려 도망가는 포도와 한바탕 우다다를 했던 모양이다.


  5층 아가씨는 우리 아이에게도 친절했다. 한 번은 우리와 계단에서 마주치자,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헬륨 풍선을 안고 나왔다.

  “저 어제 동물원 갔다가 이거 샀는데 아이한테 줘도 돼요?”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헬륨 풍선을 끌어안았고, 그날 하루 종일 풍선을 하늘로 튕기며 즐거워했다.


  3층에는 네 남매가 살았는데 그중 첫째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중·고등학생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매일같이 시커멓게 몰려와 3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대화 절반은 욕이었고 의미 없는 고함이었고 서로를 놀리는 야유와 장난이었다. 그 때문인지 2층과 3층 사이 계단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변 자국이 종종 벽화를 그리곤 했다.


  1층에 살던 할아버지는 폐지와 고물을 주우셨다. 할아버지의 눈은 하얀 밥풀이 맺혀있는 것처럼 흐렸고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등허리 뼈가 다 보이던 앙상한 몸으로 수레를 끌고 다니곤 하셨다. 사람들은 때때로 베란다에서 종이 상자를 떨어뜨렸다. 처음에는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쓰레기를 밖으로 던지는 거야?’라고 성질이 났지만, 곧 깨달았다. 이곳에서 박스를 던지는 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에서 박스를 들고 내려가는 일은 꽤 귀찮은 일이니까. 그렇게 나동그라진 박스를 누군가는 또 바지런히 주워 날랐다. 박스는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은 매트리스가 버려졌다. 1층 할아버지는 그 매트리스를 질질 끌고 와 자리를 잡고 뜯기 시작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도, 저녁이 되어 다시 집으로 오는 길에도, 할아버지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 매트리스를 뜯어내고 계셨다. 그 안의 스프링을 하나하나 꺼내 철을 모을 셈이었으리라.  연장이 마땅치 않아 작업은 꽤 오래 걸렸다. 거의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누렇게 바랜 겉 천을 벗겨냈고 마침내 커다란 크기의 스프링 골조만 남았다. 부디 고물값을 많이 받으셨길, 고된 노동의 시간과 재활용의 가치가 단돈 몇천 원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올라가려는데, 할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셨다.

  “어어!”

  무슨 일이신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아이 앞으로 작은 세발자전거를 내밀었다.

  “이이! 타! 여여 타!”

  “할아버지, 자전거 저희 주시는 거예요?”

  “어어!”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유, 할아버지 이거 파셔야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손을 거듭 내저으며 자전거를 우리 쪽으로 밀었다.

  “이이! 타! 아기 거! 아기 거!”

  아이를 보며 몇 번이나 반복하셨다. 급기야 자전거 안장을 팡팡 두드리며 앉으라고 재촉하셨다.

  “준아, 앉아볼까? 할아버지가 너 주시는 거래. 우리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자.”

  아이와 나는 함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쓸게요.”


  그날,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앞마당을 돌고 또 돌았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그곳에서 서로를 챙기는 마음만큼은 커다랬던,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던 마음들이 오고 간 그곳은

  우리의 집이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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