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주공아파트
자잘하고 많은 망설임의 시간을 지나 책장을 주문했다. 절차는 간단했다. 책장이 놓일 공간의 크기를 재고 그곳에 맞는 책장을 고른 뒤, 원하는 색상을 선택하고 결제하면 끝이었다. 몇 번의 클릭과 몇 번의 타이핑으로 책장은 우리에게 왔다.
책장이 배송 오기로 한 날, 배송 기사님께 전화를 받았다.
"5층이라서 아무래도 도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배송 기사님은 한 분이셨고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은 어깨를 풀며 내려갔다. 기사님이 책장의 위쪽을, 남편이 아래쪽을 받쳐 들고 좁은 계단 길을 책장과 함께 올라왔다. 가구의 방향을 잡아가며 끌어올리는 앞쪽이 더 힘들지, 온 무게를 받아내며 밀어 올려야 하는 아래쪽이 더 힘들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그저 두 사람이 끙끙거리며 올라오는 모습을 동동거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에서,
꼭대기 층에 살면서,
이렇게 무지막지한 가구를 시키면 어떡하냐,
사다리차라도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니냐,
라며 면박을 주거나 짜증을 낼 만도 했다.
우리 집에 올라온 택배 기사님은 한 번씩, 자주, 종종, 잊을만하면, 문을 두드리고 “택배 좀 한꺼번에 오게 시켜 봐요.”라고 툴툴거렸으니까. 병원이나 관공서 심지어 미용실에서 우리 집 주소를 적으면 태도가 묘하게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불평 섞인 소리가 날카롭게 꽂힐 거라 예상하며 홍삼 액기스를 컵에 따랐다.
배송 기사님께서는 한 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으셨다. 아니, 다른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저 책장이 놓일 자리를 잡아주고 수평을 맞춰주셨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건네셨다.
“딱 요맘때가 제일 힘든데, 애쓰시겠어요. 요새 막 매달리고 그럴 때죠? 아이들이 책장에 매달리면 책장이 아이와 함께 넘어져 버릴 수 있어요. 넘어지지 않게 책장 앞쪽을 좀 더 높게 돋워줘야 해요. 두꺼운 종이 같은 거 없어요?”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잠시 멍해졌다가 황급히 종이를 찾아왔다. 기사님께서는 손수 종이를 여러 번 접어 책장 앞에 끼워주셨고 여러 번 책장을 흔들어 보시곤 말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요.”
그렇게 우리 집 거실에 책장이 놓였다.
거실 한쪽에 커다랗게 자리 잡힌 책장, 그곳에 책을 하나하나 꽂으면서 나도 모르게 "너무 좋다. 너무 좋아."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좋아하는 책을 위해 나만 알아보는 명당자리를 선정하여 신중하게 책을 배치하였고 작가별로 책을 모아 꽂아보기도 했다. 아래쪽은 아이들 손이 닿는 곳이니 아이들이 읽을 책을 배치했다. 집에 있던 책을 거의 전부 꽂았는데도 빈자리가 남아서 굴러다니던 장난감들도 정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이곳저곳 공간이 되는대로 들어가 있던 책들이 자기 집을 찾아 이사한 느낌이었다. 가구 하나가 새로 놓인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나는 꽤 벅차올랐다.
가진 것이 많이 없는 상태로 결혼이라는 시작을 했다. 우리의 신혼집은 내가 살던 원룸이어서 그 어떤 가구도 놓을 수 없었다. 지역을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은 내 자취방에서 오빠가 살던 관사로 바뀌었고 오빠의 살림과 나의 살림은 말 그대로 합쳐졌다. 우리에겐 오빠가 쓰던 금성 냉장고가 있었고 내가 가진 삼보 컴퓨터가 있었다. 웃풍이 심해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워서 패딩을 껴입고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지만, 그래서 웃었고 함께여서 행복했다.
재밌게도 그 당시에는 가진 게 적다는 게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무리해서라도 가지고 시작해야 했나?'라는 물음표가 떠오르기도 한다. 막상 그때의 나는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바라보며 동정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 달라졌기에 그때를 동정하고 있을까. 지금의 내가 마주하는 세계가 그때의 나를 낮추어보고 있는 건 아닐까. 가진 것이 많아 꾹꾹 눌러 쌓아 놓는다고 해서 생각도 함께 단단히 쌓여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겁이 없었고 그때만 할 수 있었던 용기와 삐걱거림, 그리고 그때의 우리.
멀리서 보면 한낱 티끌일 뿐이지만 가까이 가 닿아보면 최선을 다해 반짝거렸던 그때였다.
도대체 얼마만큼 가지고 시작해야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가진다는 말은 좀 그렇지? *
* 10센치 ‘가진다는 말은 좀 그렇지’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