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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어렵고 불안은 쑥쑥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by 좋아해 Mar 06. 2025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남자친구와 데이트 약속이 있었다. 샤워하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아침 첫 소변과 함께 아이는 내게 찾아왔다.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남이었다. 입으로는 “어떡해.”를 읊조렸고 마음속에서는 ‘망했네.’를 내뱉었다. 뒤이어 떠오르는 몇몇 인물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떠오른 사람은 직장 상사였다. 유달리 나를 못살게 굴던 그가 떠올랐던 이유는 인간의 생존 본능 때문이지 않을까. 머릿속 경고등이 빨간 불빛을 빛내며 비상비상! 알림을 보내는 것 같았다. 임신이라니! 이 말을 그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덜컥 겁이 났고 찔끔 눈물도 났다.


  두 번째로 떠오른 인물은 엄마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엄마는 나를 굉장히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마음을 가만 들여다보면 엄마의 자격지심과 애정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해내길 바랐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조금 더 완벽해지길 바라셨다. 그런데 혼전임신은 완벽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일 아닌가! 심지어 그 당시만 해도 혼전임신을 부끄럽게 여겨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최대한 미루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사람은 남자친구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껴놓았다가 다른 누구보다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운이 좋아질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보다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행운이 깃들 것만 같았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우리는 만났다.


  만나자마자 “오빠 나 임신했어!”라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임신했어’라고 해야 할지 ‘임신했대’라고 해야 할지 수십 번은 고민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날 본 영화는 제목조차 기억이 나지 않고 지금도 모르겠다. 카페에서 핫초코를 시키는 나를 보며 남자친구는 말했다.

  “웬일로 커피를 안 마시네?”

  “날씨가 쌀쌀하니까 따뜻한 초코가 먹고 싶어서.”

라고 둘러대며 ‘초콜릿에도 카페인이 들어있다는데 얼마나 들어있을까?’를 생각했다.


  새 학기가 시작했으니 필요한 것도 살 겸 마트에 구경을 갔다. 마트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전자제품 코너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오빠 나 임신한 것 같아.”

  화들짝 놀라는 남자 친구의 눈이 조금쯤은 흔들렸던 것 같다. 최근에 ‘내 말 좀 들어줘.’라며 말장난을 쳤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장난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럴 것 같았어! 며칠 전에 꿈 이야기했잖아. 누나네 태몽을 꾼 건가 싶었는데 우리 거였네! 일단 뭐 좀 사자.”


  남자 친구는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불안한 모습으로 이것저것 내게 집어 주기 시작했다. 집 안 공기가 좋아야 한다며 산세베리아 화분을 하나 샀고 (지금은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셨다) 배가 부르면 다리 사이에 끼고 자야 한다며 빵 모양의 쿠션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있지만, 이제는 그냥 납작한 누룽지가 되버렸다) 커피 대신 마시라며 유자차와 호박죽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물건을 고르거나 담을 때를 제외하고 그의 손은 어김없이 내 손을 찾아왔다. 걱정과 불안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많은 선물 중에 가장 좋았던 건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그냥 꼭 잡아주던 그의 손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아이의 태몽은 ‘하얀 뱀’이었다. 오빠가 산책을 하는데 앞서 가던 아버님의 다리를 하얀 뱀이 물려고 했단다. 오빠가 달려가서 물지 못하게 손으로 제압하자 뱀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손목을 힘껏 물었다고 했다. 물리는 와중에 뱀이 하얗고 크고 몸에 윤기도 나는 것이 묘하게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아이로 인해 서로를 꽉 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에 제대로 맞물려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꽤 적절한 태몽이었다.  


  예정일을 일주일이나 넘겼는데도 아이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도분만이 결정되고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만난 아이는 포슬포슬하고 하얗고 마치 갓 쪄낸 백설기...! 같지 않았다. 축축하고 빨간 데다, 머리는 마치 불타는 땅콩처럼 삐죽 솟아 있었다. 게다가 정신없이 시끄러웠다.


  아이와의 첫 만남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었으며 그렇다고 외면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내가 포기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태어났고 무럭무럭 자랐으며 울고 울었고 또 울었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고 어제보다 조금은 더 잤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 모든 것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함께 엉엉 울기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아이는 축복과 기쁨으로 그려지곤 한다.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다. 마치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것처럼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을 틀어막는 느낌도 있다. 임신을 알게 되고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그 당시 내가 두려워하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밀쳐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아이로 인해 그 관계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교장 선생님과는 임신 소식을 전하며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고 엄마와는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다. 엄마를 누군가의 딸로, 한 사람의 아내로, 동시에 나의 엄마로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연애를 할 때는 이 사람이 나를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온통 나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오히려 내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로 인해 나는 남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통제하에 두려고 애썼다. 임신과 함께 결혼이 결정되자 비로소 깨지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그렇다. 사실 남편이 꾼 꿈의 하얀 뱀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아이와의 관계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걱정이 되고 무섭기도 하지만, 수많은 처음을 함께 만들어가야지.

  처음은 어렵고 불안은 쑥쑥, 우리를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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