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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글 May 18. 2022

순례자의 상처

오늘도 이 길을 걷는다

순례자가 되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었고

가는 길이 험하리라는 안내도 받았다.

이미 먼저 걸어간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듣는다고 아는 것은 아니다.


처음 걸을 때는  멀리 보이는 

순례자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의지를 다졌다. 다른 사람들은 포기해도 

나는 잘할  있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해 있었다.


걷다 보니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긁히기도 하고

조금은 만만치 않은 여행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일어섰다.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엔 일어났다.

강한 팔로 일으켜 세우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걷다 보니 목적지를 잃은 채

길이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 머물러 있었다.

들풀들이 주는 향기와 나무가 주는 편안함에 취해

더이상 걷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조금만 더 있자고 스스로를 회유했다.


그래. 누리자 잠깐의  여유.

 정도의 즐거움은 누려도 되잖아.

이렇게 생각한 순간 순례자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다.

한없이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폭풍우와 벼락

나무 한 그루가 지체 없이 순례자를 덮쳐 깔아뭉개고

고통에 신음하며 겨우 빠져나왔지만 

온몸이 피와 멍으로 얼룩졌고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그의 몸에 새겨졌다.


이제 더이상 그 길은 순례자가 알던 길이 아니다.

고왔던 들꽃들과 푸릇푸릇하고 

생생하던 풀들은 고꾸라지고 

힘센 장군 같던 나무들은 뿌리가 뽑힌 채 누워있다.

험한 빗줄기에 땅은 어디서 굴러온지 모르는 

돌들로 파헤쳐있고 

성난 파도마냥 후비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잠깐의 여유와 잠깐의 누림조차 사치였단 말인가.

가진  없이 떠난 길이었지만 

 정도는 누려도 된다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조차 참아주지 못하는 하늘이 

처음으로 넓다고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순례자는 더이상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또 걷게 되는 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결코 이보다 작은 일이 아닐 테니

두려움이 순례자의 웅크린 몸처럼 마음을 웅크리게 했다.


하지만 순례자에게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은 포기하겠다고 결심한들 

포기되는 것이 아니었다.

흐르는 눈물과 피만 멎었을  

여전히 아픈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가슴에 새겨진 아린  줄기 깊은 상처와 함께 

여전히 반짝거리는 순례자의 사명감은 

한걸음 한걸음을 떼도록 

약속된 영광을 향해 걷도록 한다.

거기에는 약속이 있다.

이 길은 영원한 곳이 아니다.   


순례자는 약속된 영광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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