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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Oct 15. 2024

<마녀> 리뷰│영웅과 괴물사이

[영화] <마녀> 리뷰

탁월성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맡은 바를 완벽히 해내는 것에 대한 공경과 한편으로는 기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꺼림칙한 이질감. 경외심이라고 할까. 인간에게 느껴선 안 될 것만 같은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를 영웅, 혹은 괴물이라고 부른다.


공동체의 절대다수는 범인(凡人)이다. 범인의 말과 행동은 대부분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이루어지며, 수긍할 수 있는 무형의 선 내에 존재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비범인(非凡人)이 비범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말과 행동, 능력과 재주 따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몸에 쇳덩이를 부착하고 하늘을 나는 아이언맨을 우리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올림픽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그를 칭찬의 의미로 괴물이라고 칭한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선망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 시민들이 마녀의 비범한 능력을 공동체로 받아들였다면, 마녀는 죽지 않고 영웅이 된다. 배트맨에 의해 실질적 피해를 본 시민들은 그를 영웅이 아닌 범죄자로 취급한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의적’이라고 불린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남의 것을 훔쳐도 박수받는 의로운 도적이 어딨는가. 도적은 그냥 도적일 뿐이다. 하지만, 훔친 물건을 평민들에게 나눠준 순간, 홍길동은 의적이라는 칭호를 획득한다. 결국 영웅과 괴물은 공동체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이를 가르는 기준은 공동체가 그 비범함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냐의 문제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의 한 장면


비범인에 긷든 서사 역시 영웅과 괴물을 나누는 것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영화 <마녀>(2018)에 등장한 주인공 ‘자윤’은 연구원 ‘닥터 백’의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초능력자다. 유년 시절부터 온갖 비윤리적 실험을 받았던 자윤은 실험실로부터 도망친다. 가까스로 도망쳐 평범한 가족과 함께 살게 된 자윤은 안정감을 느끼며 고등학생이 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다시 연구원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영화의 후반부엔 자윤의 살육이 대부분이지만 관객들은 자윤의 서사에 공감해 그의 살인에 쾌감을 느낀다. 이야기의 힘에 무의식적으로 설득당한 것이다.


이 영화 역시 비범인의 수용에 대한 공동체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윤을 탄생시킨 ‘연구소’는 작은 공동체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초능력자를 원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자윤의 능력이 뛰어나자 그를 경계한다. 앞서 말한 공동체의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세상은 큰 공동체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능력을 사용해 오디션에 합격하는데, 공동체원은 이를 신기하고, 대단하게 여긴다. 비범인의 능력에 대한 선망이 이곳에서 드러난다.


영화 <마녀> 스틸컷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은 자윤을 영웅으로 볼지, 마녀라고 볼지 갈릴 것이다. 자윤의 서사에 집중한 관객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능력으로 통쾌하게 복수한 그를 영웅이라 생각할 것이고, 감정이 결여된 사이코패스적인 면모와 살육을 즐기는 자윤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다면 그를 마녀라고 여길 것이다. 능력이 너무 뛰어났던 탓일까. 혹은, 연기력이 너무 뛰어났을지도. 나는 자윤의 얼굴에서 마녀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제목이 주는 선입견도 꽤 크게 작용했고.


영웅과 괴물의 씨앗은 비단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늘날 현실에서 영웅과 괴물의 선택지에 놓인 가장 큰 화두는 ‘AI’다. 대부분의 뉴스에 AI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범인의 일상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주는 것 역시 AI다. 자윤을 AI에 빗대보자. 말도 안 되는 능력으로 인간을 압도한다. 공동체를 한순간에 삭제함과 동시에 공동체에서 환영받는다. 누군가에겐 시대를 초월한 산물. 누군가에겐 내 밥그릇을 위협하는 악마의 탄생이다.


AI의 모습과 비슷해보이는 초능력자 자윤의 모습


공동체가 AI를 받아들이는 건 시간문제다. 결국, AI는 인간의 삶에 깊이 침투할 것이며, AI가 없는 세상을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마치 10년 전 스마트폰이 없던 세상처럼 자연스러운 변화다. 그러나, 이질감의 크기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비범해지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 그럴까. 함께 공존하는 영웅이 되겠지만, 아직까지 내 눈에 AI는 악마의 모습이다. 수용의 한계점을 늘리는 속도보다 그것이 진화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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