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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하 Jun 01. 2024

담론화가 만들어 내는
케이팝 디스토피아





  테니스 코트에서 두 선수가 열전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단 한 가지 사실만 추가해 보자. 한 선수의 국적은 한국이고, 다른 한 선수의 국적은 일본이다. 왠지 모르게 한국 선수를 응원하고 싶어질 것이다.




  필자는 이를 담론화의 힘이라 일컫고 싶다. 미시 서사를 거대 담론으로 바꾸는 이 힘은 두 테니스 선수 간의 경기를 꼭 이겨야 할 국가 간의 대리전으로 변모시킨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주어진 단편적 사실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앞선 예시가 그렇듯 미시적 서사를 거대 담론의 일면으로 치환해 단순 사실, 그 이상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종종 담론화는 단순 미시 서사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힘을 이끌어낸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은 한 병사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법체계에 관한 담론으로 승화되어 윤창호법을 낳았고, 여성 기숙사에 남학생 출입을 금지한 한 대학교의 이야기는 기성 체제에 관한 담론으로 승화돼 68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 사건 모두 사소한 일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담론화가 기폭제가 되어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담론화의 힘이 오늘날 케이팝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미시 서사를 왜곡함으로써 말이다.





   

  4세대 아이돌 시대에 접어들자 케이팝 씬에서 콘셉트가 모호한 그룹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의 모든 아티스트가 그들의 활동을 관통할만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이 점은 특히 각 그룹의 명칭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르세라핌’이다. 르세라핌의 영문명인 ‘LE SSERAFIM’은 ‘IM FEARLESS(나는 두렵지 않다)’라는 영어 문장의 애너그램이다. 그룹명이 말하고 있듯이 르세라핌의 콘셉트는 ‘세상에 굴하지 않는 나’, ‘야망’, ‘독기’, ‘도전’ 등의 표현으로 정리된다.





  그들의 곡에서도 이러한 콘셉트가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르세라핌의 데뷔 음반의 타이틀 곡이며 앞서 말한 그룹명의 속뜻을 밝히는 ‘FEARLESS’, 외부의 혼란이나 압력에 오히려 성과가 상승하는 성질을 뜻하는 ‘ANTIFRAGILE’, 서양 고전 속 금기를 깬 인물들을 제목에 내세운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와 같이 주요 곡의 제목은 노골적으로 그들의 콘셉트를 강화한다. 이 곡들 속의 가사 또한 그러하다.



“욕심내 더 like a witch / Show you real me 검붉어지는 빛” - <Impurities>


“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자신감 / 내가 결정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 <Burn the Bridge>



  이러한 콘셉트는 일견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내세운 ‘걸크러시’에 가깝기에 르세라핌을 그간의 걸크러시 콘셉트 그룹 계보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르세라핌은 그룹 브랜딩 과정에서 걸크러시 콘셉트의 다른 아티스트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멤버 각각의 이야기를 그룹 전체 콘셉트의 기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사에 담긴 멤버 각자의 이야기는 곡에서 빛을 발한다. ‘ANTIFRAGILE’에서 카즈하는 발레를 전문적으로 배운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고, ‘Swan Song’에선 이전에 다른 걸그룹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김채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악의적인 시선들을 직접 언급한다.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 카즈하 (ANTIFRAGILE)


“나의 이름푠 수많은 names / 부르지 중고” - 김채원 (Swan Song)





  그리고 이 과정의 정점에는 그들의 데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The World Is My Oyster’가 있다. 총 4화의 다큐멘터리는 과할 정도로 솔직하다. 멤버들이 자라온 배경과 과거사를 적극적으로 밝힐뿐더러, 다른 아티스트라면 아이돌에 걸맞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구태여 밝히려 하지 않는 무대 뒤의 모습을 조명한다. 데뷔조 멤버 중 한 명이 중도 탈락을 통보받는 모습이 그대로 화면에 담기기도 하고, 고된 트레이닝 중 트레이너의 말에 멤버들이 눈물 흘리는 장면을 포착하기도 한다. 르세라핌은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통해 오히려 이런 모습들을 부각하면서 ‘믿고, 도전하고, 이뤄내는 르세라핌’이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다.




  르세라핌의 자기주장 강한 콘셉트는 하이브가 르세라핌을 통해 전달하는 거대 담론에 가깝다. 그렇다면, 멤버 개개인의 미시적 이야기들을 모아 그들의 콘셉트로 만드는 과정을 우리는 담론화라 부를 수 있다. 멤버 각자의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얕을지는 몰라도, 르세라핌이 제시하는 거대 담론은 가끔은 부정한 세상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모든 이들에게 르세라핌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일종의 몰입감을 선사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4월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그들이 선보인 무대는 결과적으로 재앙에 가까웠다. 이전부터 음악 방송 앵콜 영상 등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돌아다녀 라이브 논란에 불이 지펴져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폭탄을 터뜨린 셈이었다. 무대 전체 영상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의 무대가 전반적으로 어땠는지 필자는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삑사리가 난 부분, 음이 맞지 않는 부분들만 짜깁기된 영상은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퍼졌다는 것이고, 그들의 라이브 실력에 조롱, 비판, 비난이 쏟아졌다.




  미시적 차원에서라면, 그날의 라이브에는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다. 코첼라 무대의 특성상 데뷔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라이브에 가까운 무대를 선보인다는 중압감과 약 40분 동안 10곡을 소화해야 하는 여건을 따져보았을 때, 이제 약 데뷔 2주년을 맞이한 멤버들이 퍼포먼스와 라이브, 모든 측면에서 끝까지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사쿠라가 13년 차 아이돌이라 불리지만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기 시작한 지는 약 2년에서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수많은 비판의 요지는 르세라핌의 콘셉트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조롱 또한 결국은 르세라핌의 콘셉트와 맞닿아 있다. 쉽게 말해, ‘독기와 야망을 그렇게 강조하더니 라이브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면 어쩌자는 거냐’는 식이다. 실제로 르세라핌은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 돋보이는 아티스트였기에 더더욱 능력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날의 무대는 하이브가 르세라핌이 대표하는 거대 담론으로서 내세운 야망, 도전과 저항에 부합하지 않았고, 코첼라 두 번째 무대에선 AR 음량을 대폭 키우며 세상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코첼라 무대 이후, 세상에 인정받을 필요 없다는 르세라핌의 태도는 미시적 차원에서 르세라핌 멤버들의 고충을 인정해 달라는 르세라핌 팬들의 세상을 향한 간구로 돌아왔다. 이 안쓰러운 결말의 책임은 단연코 하이브에 있다. 상업적인 의도로 무리하게 멤버들의 서사를 거대 담론으로 치환한 책임을 하이브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멤버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아티스트의 콘셉트로 치환했다면, 적어도 아티스트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소속사로서 멤버들의 실력과 현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할 하이브가 코첼라 무대에 르세라핌을 세운 것은 크나큰 오판이었다. 이러한 판단력으로 아티스트를 위험에 빠뜨리고도, 아티스트를 보호하거나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이브는 더욱 비판받아야 한다.




  미시 서사에 왜곡을 가해 거대 담론으로 치환하는 순간, 잠재적 피해는 고스란히 미시 서사의 주인공이 져야 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많이 봐왔다. 누군가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거대 담론 속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경우, 단순 미시 서사의 주인공은 거대 담론 내 특정 역할을 강요받게 된다. 이 상황에서 한 번이라도 주어진 역할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사람들은 금세 몰려들어 비판과 비난을 쏟아붓다가 ‘변했다’, ‘실망했다’라는 표현으로 역할을 뺏어가려 한다. 그 사람은 맡고자 하지도 않았던 그 역할을 말이다.






  케이팝 산업을 논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가끔씩 소비자들만 사람이고 아티스트는 소비자에게 팔아야 하는 상품처럼 여긴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경영학적인 관점에서 쓰인 글이라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4세대 아이돌계를 장악하고 있는 ‘콘셉트론’ 역시 마케팅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에 이러한 경향이 드러난다.




  멤버 개개인의 이야기를 부각해 하나의 통일된 콘셉트를 완성하는 르세라핌의 전략은 경영학적인 면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지속 가능할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은 부족했다. 아티스트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이기에 미리 설정된 콘셉트를 쥐어준다고 이에 맞는 서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멤버의 서사를 무리하게 그룹의 콘셉트, 거대 담론과 엮게 되고, 이는 잠재적인 피해에 멤버들을 직접적으로 노출시켜 개개인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현재 르세라핌을 비롯해 많은 아티스트들이 거대 담론으로 변모한 미시적 서사로 인해 불필요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르세라핌의 친일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하이브와 민희진 대표 간의 갈등이 심화되며 갈등은 대중에 의해 불필요하게 담론화되었다. 이 갈등으로 인해 탄생한 돌연변이 같은 이런 류의 논란들은 아티스트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하이브와 민희진 대표 간의 갈등의 담론화 또한 르세라핌의 이야기와 다른 측면에서 담론화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주요한 소재로 글에 담으려 했으나 글 쓰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져 필자가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 빼고 말았다.




  더 이상 이러한 담론화로 인해 아티스트들이 피해 보는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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