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힙합의 중심에는 빈지노도 아닌, 스윙스도 아닌 '뷰티풀너드'(활동명: 맨스티어)가 있다. 뷰티풀너드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힙합과 래퍼 전체를 조롱하고, 한국 힙합 씬에 대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디스전은 예전에 종종 있던 힙합과 코미디 간의 충돌과는 다르게 한국 힙합계를 되돌아보는 모양새로 정리되는 추세다.
이 디스전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지금,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한국 힙합계가 묘하게 한국 코미디계의 옛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 코미디 씬이 어떻게 붕괴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한국 힙합 씬의 붕괴와 어떻게 유사한지를 이야기하고, 한국 코미디의 재기로부터 한국 힙합이 어떤 점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2020년, ‘개그콘서트’가 막을 내렸다. 관계자들은 잠깐의 휴식 기간을 가진다고 이야기했지만, 명백한 폐지였다. ‘웃찾사’는 이미 한참 전에 폐지됐고, ‘코미디빅리그’ 또한 간당간당했다. 마지막 화 녹화 현장엔 한동안 출연이 뜸했던 개그맨들이 모였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몇몇은 이미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고, 다른 몇몇 또한 유튜브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적지 않은 젊은 개그맨들 또한 이미 KBS를 떠났지만, 남은 몇몇은 관객들을 웃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런 개그콘서트의 마지막 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개그콘서트는 이미 몇 년 전에 종영했다. 누군가에게는 3년 전, 누군가에게는 5년 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6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종영 소식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누구에게도 개그콘서트가 여전히 재밌다는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하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당시 개그콘서트 코너의 짤들은 웃음이 아닌 조롱의 대상이었다.
개그콘서트로 대표되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은 오랜 기간 한국 코미디의 표준이었다. 당연스레 사람들은 1주일에 1번, 방송사 소속 코미디언들이, 여러 코너를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코미디만을 코미디라 인식했고, 코미디언들 또한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진출이 코미디언으로서의 최종 진화형에 가깝다고 여겼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여러 소극장에서 공개 코미디 경험을 익히고, 방송사의 공채 개그맨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후, 방송 무대에 서는 루트를 착실히 밟았다. 시청자들은 특정 요일마다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아 코미디를 시청했다. 십수 년 동안 한국 코미디 씬은 이런 모습이었다.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는 게 익숙해질수록, 견고했던 코미디 씬에는 금이 하나둘 생겨났다. 사람들은 더이상 일요일 밤에 TV 앞에 모이지 않고, 각자의 화면을 본다. 과하게 정형화되었거나, 게스트 의존적이라거나 등의 다양한 이유로 공중파 코미디언들의 개그 또한 옛날 같지 않았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이 종영한 후, 많은 코미디언들이 정신적, 경제적 방황을 겪었다. 마지막까지 개그콘서트와 함께한 KBS 코미디언, 김원훈은 우울증을 겪었고, 조진세 또한 월 수익이 4~50만 원에 그쳤다. 메뚜기떼가 휩쓸고 지나간 후의 논밭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2021년 초, ‘유 퀴즈 온 더 블럭’엔 김해준과 김민수, 두 코미디언이 출연한다. 기존 방송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둘은 유튜브에서 큰 성공을 거둔 참이었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을 구성한 세 사람(김민수, 이용주, 정재형)은 여러 이유로 공중파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일찌감치 보이지 않은 얼굴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2000년대 초반의 감성을 재현한 캐릭터들이 나오는 ‘05학번이즈백’, 우리네 아저씨들의 모습을 코믹하게 풀어낸 ‘한사랑산악회’, 코로나 팬데믹 속 비대면 소개팅을 가정한 ‘B대면 데이트’와 같은 콘텐츠들로 코미디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존 코미디 씬이 무너지니 우리에게 익숙한 ‘코미디’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는 다양한 장르의 코미디들이 싹을 텄다. KBS의 신인 코미디언 둘은 ‘숏박스’로 스케치 코미디를, 김대희는 ‘꼰대희’로 토크쇼를, ‘메타코미디’라는 이름으로 론칭된 코미디언 레이블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주력으로 내세웠다. 코미디의 외부 경계 또한 허물어졌다. 공중파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동일 방송사의 공채 출신들만 볼 수 있었지만, 코미디의 주 무대가 유튜브로 옮겨오며 기존의 코미디 유튜버, 틱톡커 등이 공채 코미디언과 함께 콘텐츠를 찍는 등 코미디 씬의 주요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도전이 신인 코미디언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신인 코미디언이든 유명 코미디언이든 어느 무대에 서느냐보다는 남들을 웃기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우선이었다. 이미 얼굴이 많이 알려진 유명 코미디언들도 기존의 무대를 고집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김대희는 물론, 이수근과 박나래는 넷플릭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했고, 박성호는 요들송을 불렀다.
씬의 파괴 끝에 최종적으로는 개그콘서트가 기존의 형식보다는 조금 더 유연하고, 디지털 친화적으로 재탄생하며 한국 코미디 씬의 재정립은 수미상관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 체제의 빈자리에 다양한 대안들이 경쟁하는 코미디계의 모습은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현신에 비할 만하다. 사람들이 기존의 형식에 신뢰를 잃은 것뿐이지, 코미디를 좋아하는 수요는 분명히 존재해 왔기에 코미디언들은 이를 토대로 적극적으로 새로운 씬을 창조해 냈다.
그렇기에 현재 코미디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직장도 잃어봤고, 최고의 무대도 잃어봤고, 일종의 소속사도 잃어버린 그들은 이제 대중의 관심과 신뢰도를 회복하고 다시금 사람들을 웃기겠다는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반면, 한국 힙합은 길을 잃은 것 같다. 충실한 힙합 리스너도 아닌 필자가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웃긴 노릇이다. 하지만, 많은 래퍼들이 잇따라 유튜브에 랩으로써 한국 힙합 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 이 말이야말로 지금의 한국 힙합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익숙한 힙합 씬은 붕괴됐다. 엠넷의 ‘쇼미더머니’는 막을 내렸다. 혹자는 쇼미더머니를 이토록 중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한국 힙합의 중심에는 쇼미더머니가 존재했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쇼미더머니는 인기를 얻으며 한국 힙합을 정형화하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는 마치 한국 코미디 씬에서 개그콘서트의 위치에 비할 만하다. 래퍼들을 실력으로 줄 세우는 형식에 과몰입해 그들을 순위 매기고, 서로 처음 보는 래퍼들 간의 우스꽝스러운 디스전을 보며 누가 더 잘했는지를 따지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곧 쇼미더머니의 성공이자 한국 힙합 씬의 현주소이다.
더불어, 한국 힙합을 이끈 거대 레이블들이 하나둘 몰락하면서 익숙하게 봐오던 거대 레이블 구도도 끝났다. AOMG, 저스트뮤직, 인디고뮤직, 메킷레인, 일리네어, 앰비션, 하이어뮤직 등. 이미 익숙한 레이블들 중 많은 수는 해체됐고, 적잖은 수가 빈 깡통이 됐으며, 남은 몇몇 또한 그리 소속감과 연대의식이 넘치는 곳이라 볼 수는 없다.
래퍼들 또한 무대를 잃고, 출세길을 잃고, 소속사를 잃은 것이다. 코미디언들이 개그콘서트를 잃은 2020년과 같은 상황이다. 단지 쇼미더머니가 소리소문 없이 다음 시즌으로 돌아오지 않고, 레이블들이 차차 문을 닫아 덜 극적이었을 뿐이다.
가장 뼈아픈 건 리스너들의 관심과 신뢰 또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2022년부터 음원 연간 차트에서 힙합 가수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수의 힙합마저도 이제는 볼 수 없을 쇼미더머니의 음원이 대다수다. 힙합 팬들 또한 한국 힙합에 관심이 떨어진 듯하다. 쇼미더머니 속 바비, 비와이를 보며 자란 청소년들은 이미 성인이 되었고, 그동안 힙합을 계속 파고들어 어느덧 외국 힙합도 자연스레 듣는다. 그런 리스너들은 외국 힙합을 이야기하고, (사건사고마저도 스케일이 다른) 외국 래퍼들 이야기가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지, 한국 힙합과 래퍼들에 대해 이야기할 유인은 딱히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6NEUN_MWJpg
한국 힙합이 이제는 한국 코미디로부터 배워야 할 때다. 무너진 도덕성, 래퍼들의 행태를 돌아보며 반성하라는 식의 뻔한 훈계가 아니다. 기존 씬의 붕괴 이후 코미디언들은 어떻게 새로운 씬을 구축했는지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코미디의 빠른 재기는 남을 웃긴다는 공통적 목표 하에 코미디언 모두가 다양한 시도를 한 끝에 만들어낸 성과다. 어느 씬이든 파괴는 일어난다. 하지만 파괴에 오랫동안 신음할 것인가, 창조로 빠르게 이어질 것인가는 이 씬의 구성원에 달렸다.
대중의 신뢰도와 관심을 잃고, 중심 무대를 잃은 지금, 래퍼들은 힙합 씬을 반추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 코미디의 이야기가 새로운 씬을 일궈내는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