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독립은 유난히 느려터졌던 거 같아
'최엘비'라는 래퍼를 아시는지. 대부분이 이 이름을 처음 들었거나, '쇼미더머니'에서나 몇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몇 달 전, '도망가!'라는 곡을 접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처음 이 노래를 접했을 때,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이 곡이 내 심장을 몇 번이나 울려댈지. 홀린 듯 이 곡이 수록된 앨범, '독립음악'의 전곡을 들었고, 처음으로 왜 곡을 따로따로 듣기보다는 앨범 수록곡 전체를 순서대로 들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가 된 것은 물론이고. 2010년대 초반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빈지노의 '24:26'이 있다면, 내겐 '독립음악'이 있다고 가히 말할 수 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작년 생일을 이 앨범과 함께 맞이했을 정도다. 혼자서 신도림역으로 영화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신도림역에서 쪼그려 앉아 막차를 기다리고는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2호선 막차에 실려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는 본인의 생일에 시니컬한 사람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고, 나의 생일도 똑같은 365일 중 하루일 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앨범만큼은 꼭 이 순간에 듣고 싶었다. 새해에 처음으로 듣는 노래가 그 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미신도 코웃음 치며 넘겨듣던 나였다.
왜였을까. 나는 왜 스물한 번째 생일을 함께할 앨범으로 이 앨범을 택했을까. 첫째는 동질감, 일체감이었다. 앨범명에서도 알 수 있듯 최엘비는 홀로서기를 노래한다. 먼 옛날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종속의 근원을 찾아간다. 첫 번째 종속은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래퍼들에게서 나온다. 비와이와 씨잼의 오랜 친구였던 그는 그들 사이에 묻혀있음과 동시에 그들 덕분에 빛을 본다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다. '쇼미더머니'라는 틀 안에서도 친구들과 달리 빠르게 탈락한다. 인생은 지면서 배우는 거라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너무 많이 지고 실패하는 건 아닌가. '어쩌면 지는 역할, 그늘이 내 위치는 아닐까'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다. '섹시 스트리트', '우주비행'이라는 걸출한 크루에 속해 있는 덕에 공연도 나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하지만 잘나가는 래퍼들 뒤에서 그는 더욱 소외된다. 그래서 그는 본인을 슈프림 티셔츠에 빗댄다. 슈프림 로고 없이는 스스로 아무런 가치도 증명해내지 못하는 흰색 무지 티가 되어버린 듯 열등감과 자괴감에 휩싸인다. 이러한 종속은 남들에 의해 쉬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교 대상인 그들을 처음 본 순간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는 생각한다.
두 번째 종속은 부모에게서 나온다. 받은 것은 많지만, 갚은 것은 없다. 비와이와 씨잼이 나란히 결승에 진출한 장면을 어머니가 볼 때는 괜히 얼굴이 화끈해진다. 부모의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지만 기쁠 때보단 슬프거나 힘들 때에 부모 생각이 나고, 결국 물질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부모의 품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빨리 부모를 은퇴시키고 싶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일을 나가시고, 그는 여전히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쇼미더머니'에서 래퍼들의 부모가 나와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장면들, 본선 무대에서 어머니와 포옹하는 장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송곳으로 찔리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까.
누구는 꾸준히 해도 묻혀지고
누구는 꿈 깨듯 현실에 부딪혀 부서져
누구는 만들어 영화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결과물의 주인공들은
왠지 나를 보는 것만 같아
별 볼 일 없어도 각자의 삶이 있듯이 말이야
왠지 앨범 속 노래들의 이야기를 줄글로 풀어놓는 것뿐인데도 나의 이야기가 조금씩 섞이는 기분이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대학과 같은 몇몇 타이틀을 제외하곤 나에게 남는 것은 없다고 절망한 적은 몇 번인가. 여러모로 잘나가는 남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어쩌면 내 위치는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 아닐까? 매체 속에서 또래를 접하는 것도 두려워졌다. 또래는 무슨, 나보다 어린 사람도 많다.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그 잣대를 포기하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서 있다. 원인 모를 열등감의 뿌리를 따라가보면, 항상 그 뿌리는 내 가슴 속에 깊이 뻗어 있었다. 무력한 나, 그럼에도 못돼 처먹은 나.
부모에게서 예속되어 효도를 향한 길에서 불효를 저지른 적은 또 몇 번인가. 가끔은, 아니 자주 빨리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날이 서 오히려 부모를 겨누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목적이 전치되어버린 느낌을 떨쳐낼 수 없다.
'독립음악'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이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며 (아니, 들으며) 공경심과 부러움,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 편하게 지난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는다. 열등감과 슬픔을 밖으로 표출해내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일인지 나는 안다. 나 자신도 위로하지 못하고, 나 자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하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스스로에게도 위로받고 용서받지 못할 일을 남에게 밝혀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나를 정말로 사랑해주는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 추악한 것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골계미'라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배웠어도 말이다. 그걸 드러내서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한다는 것이 당사자로선 얼마나 큰 용기인지 모른다. 용기가 없는 내가 먼발치서 최엘비, 그의 비상을 바라본다.
이 앨범의 다섯 번째 트랙인 '독립음악'에서 그는 홀로 서기로 마음을 먹고 '독립음악'을 내기로 다짐한다. 여섯 번째 트랙인 '살아가야해.'에서는 이제 남과 비교하며 나 자신을 매도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주변 사람에게 용기와 의지를 얻는다. 여덟 번째 트랙인 '최엘비 유니버스'와 아홉 번째 트랙인 '슈프림'에서는 과거의 자신을 디딤돌 삼는다. 열 번째 트랙인 '잘먹어/걱정마'에서는 부모님의 걱정을 불식시키고 비상을 위한 준비를 끝낸다.
난 때론 저것들이 무서워
밤 늦게도록 잠에 들지 못하는 괴로운 사람들이 나열된 미술관 같아서
저 직사각형 안에는 각자의 고민들로 꽉 채운 불빛들이 새어 나와
외로움이 서울의 밤을 장식하고 있어
우리는 살아가야 해
마지막 트랙인 '도망가!'에서는 땅을 딛고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르는 최엘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대개 노래에서 '도망'이라는 단어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뜻한다. 숨 막히고 바쁜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단어다. 하지만 '도망가!'에서의 '도망'은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현실로부터 도피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향해 도망간다. 그 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현실이 우리의 꿈을 잠식하며 다가오고 있기에, 달려야만 한다. 최엘비는 이 곡에서 그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인 '브로콜리너마저'와 협업하며 현실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고, 또 꿈을 향해 한 발짝 가까워졌다.
나도 도망가자. 현실이 하루하루 나를 쫓아오고 있다. 이미 현실에 사로잡힌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몫까지, 그들의 꿈까지 업고 도망가자.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것조차 꿈을 좇고 있는 것인지 이미 현실에 사로잡혀 부유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발을 굴려야 한다.
도망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말이야
끝엔 뭐가 있을지 몰라 나도
네 꿈은 가져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