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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레탕트 Mar 24. 2024

<패스트 라이브즈>
떠난 것이 아닌 남겨진 사람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 리뷰

성인이 된 후 SNS를 통해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과 재회하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심지어 둘 중 누군가 결혼한 이후에 재회하는 이야기라면 좀 더 익숙한, 그리고 자극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영화 <페스트 라이브즈>는 첫사랑 영화의 클리셰들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의외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감성 넘치는 연출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H Mart에서 울다」와 같은 문학 작품부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미나리>, <성난 사람들> 등 TV 시리즈, 영화까지 아시아계 이민 2세, 3세들의 시선을 담은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요소를 가득 담은 영화라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래 글에는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출처:IMDB)


해 질 녘 찾아오는 추억

영화의 제목을 ‘인연’이라고 바꿔 불러도 될 만큼, 영화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8천 겁의 삶을 지나’ 만들어지는 것이 ‘인연’이라고 영화는 설명하는데, 영화에서의 설명처럼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유래한 개념임에도 ‘인연’이라는 발음이 주는 묘한 느낌 때문에 지극히 ‘한국적’인 개념처럼 다가와 신선했다.


‘인연’이라는 단어가 ‘Fate’, 혹은 ‘Destiny’ 등의 영어로 번역되었다면, 영화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는 힘이라 ‘운명’과는 다르며, ‘악연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긍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지도 않다. ‘나영’과 ‘아서’의 만남처럼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건과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인연’이지만, ‘나영’과 ‘해성’과의 만남과 헤어짐도 ‘인연’인 것이다.


영화에서 ‘나영’과 ‘해성’은 서로의 밤과 낮을 온전히 함께 보내지 못한다. 24살의 둘은 다른 나라에 있어 함께 하지 못하며, 끝끝내 만나게 된 36살의 둘은 ‘나영’의 결혼으로 함께 ‘밤’을 보낼 수 없다. 반면에 ‘아서’는 ‘나영’과 함께 밤과 새벽을 함께 보낸다. 12년의 간격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나영’과 ‘해성’의 인연은 끊길 듯 끊기지 않지만, 밤과 낮 모두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다.


TV시리즈에서의 유쾌한 모습이 익숙한 '그레타 리'의 새로운 모습이 반갑다. (출처:IMDB)


평범한 한국인

영화 속 한국의 이미지는 초반 몇 장면이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흥미롭다. 오래 전의 초등학교 교실의 분위기, 행군하는 군인들, 소주와 삼겹살 냄새로 가득한 술집, 대학 도서관의 풍경 등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이 기억에 남는 것은 최근의 한국 영화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일상적인 풍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벨상’이 타고 싶어서 이민을 가는 것이라고 말했던 ‘나영’이 ‘퓰리쳐상’, ‘토니상’으로 자신의 꿈을 구체화해 나가는 반면, 좋은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서, 벌이가 좋지 못해서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해성’의 모습이 서구권 문화에서 바라본 전형적인 아시아인 같아 불편하면서도, ‘평범’이라는 개념이 상향 평준화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담고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봤던 모든 외국 영화 중 가장 리얼한 한국 지하철 풍경이었다. (출처:IMDB) 


이토록 어색하고도 지지부진한 만남

영화는 대부분의 쇼트를 컷 편집 없이 길게 보여준다. 긴 시간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만 보여준다거나, 길을 걷는 시간 동안 나누는 이야기를 끊지 않고 전부 담아냈다는 점이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다.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러한 연출 방식은 ‘나영’과 ‘해성’의 관계를 닮아있다.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밀한 관계라고도 결코 할 수 없는 둘의 어색하고도 지지부진한 관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둘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첫 장면에서 누군가 던지는 질문의 답은 아마 '인연'일지도 모른다. (출처:IMDB)


지금이 다음 생을 위한 것이라면

12살의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24살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로 몇 번의 대화를 나눈 것을 제외한다면, 낯선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서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4년의 세월을 지나 같은 시간과 공간에 함께하고 있어 ‘인연’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헤어짐을 앞둔 ‘나영’과 ‘해성’은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별을 기다리고, ‘해성’은 8천 겁의 삶을 지나고 있고, 지금이 전생이라면 다음 생에 만나자고 말한다. 영화의 제목 ‘페스트 라이브즈’ 즉, ‘과거의 삶들’은 12살의 첫사랑, 12살의 추억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혹은 다음 인생과 또 다음 인생을 기다리는 ‘과거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나영’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이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아닐 것이다. 24년 전 서울, 거기에 남기고 온 12살의 ‘나영’과 영영 이별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아이처럼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라’ 앞에 서 있는 것은 ‘해성’이 아닌 ‘아서’다.


둘의 헤어짐은 배경 속 슬레이트 셔터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8천 겁의 삶 중 하나였을까. (출처: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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