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결혼과 딸의 독립, 그리고 16년 키운 강아지와의 이별까지, 예상할 수 있는 헤어짐들이 작년에 몰려서 닥쳐왔다.
6년 연애한 아들의 결혼은 예정되어 있었고, 노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것도 인생의 순리였지만 딸아이의 이른 독립은 사실 좀 서운했다. 그러나 집값 상승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폭탄을 장착하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청년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막아설 수는 없었다.
타고난 외로움 증 환자인 엄마를 떠난 딸아이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나 보다. '홀로서기 심리학'은 딸이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주위에 벽을 쌓고 사는 은둔 고립형은 아니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털어내며 속내를 보이는 것이 내겐 익숙지 않다. 필터 없이 소통하다가 생길 수 있는 오해와 간섭에 흔들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의 울타리 안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을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누리는 안정감보다 대체로 우위에 놓곤 한다. 그러나 외롭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작가는 “성(城)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고 표현한다.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과 반대 개념이다.
내가 성에 살고 있다면 여러 정황으로 봐서 공주는 아닐 테고 성문을 지키며 수시로 들락거리는 수문장 정도 될 거 같다.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 속에 머물다가도 가끔씩 외로움에 못 이겨 성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타인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음에 안도하지만 부득이하게 발생하는 감정 소모가 버거워서 다시 나의 성을 향해 꽁지가 빠지게 뛰어 들어간다.
돌이켜보면 어느 한순간도 외롭지 않은 시절이 없었다.
10대 때도, 20대 때도, 결혼을 해서도, 아이들을 낳아서 키울 때도 항상 외롭다는 느낌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누가 옆에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는 나의 존재감이 무기력해지면서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러면 얼른 혼자 있는 곳으로 숨어 버리곤 했다. 여럿 속에서 외로운 것보다는 홀로 있으며 외로움과 독대하는 것이 훨씬 정화와 위안의 시간이 된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확보되는 것을 무척 소망하던 육아에 지쳐 지내던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맞이한 적막함이 가끔 깊은 우울로 이어지는 지금의 이 위험한 시간도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불안해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기 싫어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끌어 온다는 것처럼, 나 역시도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 가면서 외로움을 끌어들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변심한 연인에게 매달리듯 외로움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작가는 삶의 형태로 옳고 그름을 가르지는 않는다.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마을 주민’이든, 그렇지 못한 ‘성 주민’이든, 혹은 성문 근처에서 들락거리는 사람이든 중요한 것은 바르게 홀로서기를 하는 것에 있다. 마을에 살며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쉽게 좌우되거나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침범할까 봐 경계태세를 취하는 삶도 결국 타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홀로서기란 삶의 주도권을 나에게로 가져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육아의 최종 목표는 자녀의 독립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던 두 아이를 나의 울타리에서 떠나보냈으니 공식적인 목표는 이룬 셈이다.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입장에선 동일하다. 그렇게 보면 인생의 목표를 성공적인 홀로서기라고 살짝 선회해서 말할 수도 있겠다.
이미 ‘홀로 있기’는 매우 친숙하다.
이제는 딸아이가 바라는 대로 ‘홀로 서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홀로서기라는 것이 책 한 권을 읽었다고 해서 뚝딱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세상을 향해 시동을 거는 아가의 첫걸음마처럼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감동이고 본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적 같은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