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아파트 위층에 새 가족이 이사를 온 후로 새벽 4시가 나의 기상시간이 되었다. 발꿈치로 쿵쿵 내려 찍는 발망치 소리가 귀를 타고 심장으로 내려와 예민한 피를 온몸으로 실어 나른다. 신경이 곤두서고 나면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없다. 계속되는 수면 부족을 견딜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끝에 실내화를 신어주십사 메모를 적어 윗집 문에 붙여 놓았다.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지 우려하면서.
나도 이런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18년 전에 두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에서 살았을 때 일이다. 해 떨어지고 나면 외출이 쉽지 않고 TV도 재미없으니 저녁 시간이 무척 지루했다. 그래서 ‘테이블 축구 게임기’를 사게 되었다. 여러 개의 긴 봉에 고정되어 있는 축구선수 인형들을 측면 손잡이로 회전시키며 골을 넣는 것으로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도 등장하는 인기 있는 게임기이다. 단순해 보였는데 몸도 써야 하고 머리도 굴려야 하고, 상대의 심리도 파악해야 했다. 점차 스킬이 늘고 상대를 교란시키는 트릭도 체득하게 되니 무료했던 저녁이 어느새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공 부딪치는 소리가 이웃에 전해질까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몇 주가 지나도 별다른 신호가 없으니 맘껏 그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문 앞에 편지 한 장이 붙었다.
관리실에서 보낸 공문서 형식의 편지였다.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주변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표현이 무척 구체적이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딱딱한 것이 부딪치는 소리,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 그 소리가 난 후에 여러 명이 환호하는 소리, 웃는 소리, 박수 소리 등등 마치 우리의 모습을 직관하며 글을 쓴 양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빼박이었다. 그곳에 살면서 다른 집에서 나는 소리나 진동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나라는 건물을 참 튼튼하게 잘 짓나 보다 안심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공동주택의 소음문제를 해결하는 규칙이 정해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찾아와서 항의하지 않고 관리실을 통해 문서로 알려 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타국에 사는 것은 사회적 약자가 된 느낌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항상 깔려 있다. 잔뜩 화가 나 있는 이웃이 직접 찾아왔었더라면 적잖이 공포스러웠을 것 같다.
“띵동~~”
점잖아 보이는 여자분이 내가 붙여 놓았던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불편을 줘서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은 했지만 식구가 2명이고 집을 비울 때도 많은데 진짜 그렇게 불편하냐고 묻는 것으로 보아서 무조건 수긍할 생각만은 아닌 듯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나도 그때 일어난다’는 말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인다.
“예민한 편인가 보네요. ”
아래층에 예민한 사람이 살고 있으니 양보하겠다는 식의 내겐 다소 억울한 결론이긴 했지만 감정 다툼 없이 종료되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 후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서로 모른 척 얼굴을 돌린다.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좋은 이웃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투명인간이 되고 나니 어색하고 편치가 않다.
평소에 인사라도 좀 해 두었으면 나았으려나?
관리실이나 경비실을 통해서 전했으면 나았으려나?
층간소음 문제로는 열어서도 열리게 해서도 안 되는 금단의 문을 사이에 두고 이웃인 듯 이웃 아닌 이웃들이 모여사는 곳, 배려가 익숙한 사람도 졸지에 무개념 민폐자가 될 수도 있고, 싫은 소리 못하는 이도 과감하게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무례를 범하게 되는 곳!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꽃처럼 풀처럼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