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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바로 알기-10

대조국 전쟁과 스탈린 그리고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

by 김남기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번의 독소전쟁 내용은 다른 때보다 좀 길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내용을 다루니 그렇게 되네요.)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파시스트 군대가 소련을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한지 21개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 독일은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단숨에 점령했고,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를 점령했으며 프랑스 또한 점령했다.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영국의 본토를 대대적으로 공습했으며, 1941년에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지역까지 단숨에 점령했다. 나치 독일은 유럽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유럽의 대다수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대규모의 병력을 모아 소련을 침공했다.

1941년 11월 7일 10월 혁명 기념일에 연설하는 스탈린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략한 히틀러의 파시스트 군대는 153개 사단과 3,700대의 탱크 그리고 2,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했으며, 최소 3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투입됐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당시 동원한 병력이 최소 60만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이었으니, 그것보다 3배 혹은 5배 이상이나 많은 병력이 소련 침략에 동원된 셈이다. 독일군은 1500km에 이르는 전선을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크게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소련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격 당일 1,200대의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독일 공군은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루프트바페(Luftwaffe)의 공격을 받았다.


지난번 9장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소련의 붉은 군대는 1938년 150만 명이었던 대규모 병력이 1941년에 이르러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시기 7,000대 이상의 탱크(이 중 1,851대는 T-34와 같은 신형전차)를 생산했고, 1만 7,745대의 전투기를 보유했으며, 대포도 3만 문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초기에 연전연패와 후퇴를 거듭하게 됐고, 스탈린은 독일군의 침공 날짜를 예상하지 못했다. 독소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본 도쿄에서 독일 기자로 위장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는 1941년 초 소련 정부에게 1941년 5월에 독일이 공격할 것이라는 보고를 보냈지만, 1941년 6월 20일에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가 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 이전에 보낸 조르게의 초기 보고는 독일이 영국을 끝장낸 다음에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즉, 스탈린은 초기 조르게의 보고를 너무 깊게 믿었고, 그 이후의 보고는 안 믿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스탈린은 분명 히틀러의 침략에 대비했다. 5~6월에 80만 명 이상의 예비군을 소집했고, 5월 중순 28개 사단을 서부 관구들에 배치했으며, 27일 야전 지휘소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에는 국경 관구들의 요새 지역으로 3만 8,500명의 병력을 보냈고, 6월 12~15일 관구들에 국경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6월 19일 관구 본부들에 새로운 야전 지휘소로 이동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관구들에 표적을 위장하고 항공기를 분산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1941년 6월 그러니까 히틀러의 침략 이전 소련의 붉은 군대는 300여개 사단애 대략 550만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 중 절반 이상인 270만 명은 서부 국경 관구에 주둔 중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기습전은 소련군의 중심부를 타격했고, 결과적으로 1941년 말에는 수도 모스크바 외곽까지 독일군이 점령하게 되는 결과가 나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6월 22일에 시작된 독일의 소련 침략은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전을 앞당겼다.

서구 사회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쟁에서 보인 무능함과 처참한 결과를 주로 언급하며 스탈린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 당시 스탈린만큼 소련의 군대와 인민을 결집시킨 주체도 없었다. 우선 1941년 7월 3일 스탈린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소련 인민들이 단결하여 싸울 것을 촉구했다. 스탈린의 감동적이고 위대한 연설은 수많은 소련인민들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소련 인민이 붉은 군대에 자원하여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웠고, 독일 파시스트가 점령한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파시스트들의 병참에 큰 타격을 가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이전 소련의 군대와 인민은 독일 파시스트 군대에게 사상 최초로 지상전에서 참패를 안겨주기도 했다. 1941년 7월 10일에 시작된 스몰렌스크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점령하면 300km 떨어진 모스크바로 곧장 진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몰렌스크에서는 두 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두달간의 전투 동안 파시스트 침략자들은 2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것은 독일 장군의 추산에 근거한 것이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스몰렌스크 전투가 독일의 전격전을 분쇄하는 토대를 만들었다.”라고 이후 회고록에 썼다. 이처럼 스몰렌스크에서의 소련군대와 인민의 영웅적 저항은 모스크바 방어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전략적으로 소련이 승리를 거둔 셈이다.

모스크바 퍼레이드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소련의 T-34 전차.

1941년 9월 30일 나치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이후 독일 항공기들은 모스크바 인근까지 접근하여 폭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시민들이 공포에 빠졌엇다. 나치는 모스크바에서 80km나 떨어진 곳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정부의 일부는 이미소개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남았다. 모스크바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이 거세졌음에도, 스탈린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소련 붉은군대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와 논의한 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1941년 11월 7일 10월 혁명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인민들에게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실제로 스탈린 또한 모범을 보였다. 그 당시 스탈린이 했던 연설 일부를 발췌하겠다.


“동지들! 붉은 군대의 육군과 붉은 군대의 해군 동지들! 그리고 지휘관과 정치일꾼들! 남성·여성들로 구성된 게릴라 전사들이여! 전 세계가 동지들을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강도 무리들에 맞서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희망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노예화된 유럽의 민중들은 바로 동지들을 자신을 구원해줄 해방자라 믿고 있습니다. 유럽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위대한 사명이 바로 동지들의 운명에 달렸습니다. 당연히 동지들은 이 위대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있습니다! 동지들이 싸우고 있는 이 전쟁은 바로 저 파시스트들에 맞선 해방전쟁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성전입니다! 레닌의 기치 아래 승리를 향해 나아갑시다!”


이와 같은 연설은 실제로 인민들의 저항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제프리 로버츠가 집필한 <스탈린의 전쟁>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겠다.


“스탈린의 어조는 급박했지만 자신만만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이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며, 그들은 오직 소련에서만 심각한 저항에 부딪혔다고 지적했다. <동지들, 우리의 병력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우쭐대는 적은 곧 쓴맛을 보고 나서야 이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스탈린의 연설에 대한 인민들의 반응은 엇갈렸으나,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당과 경찰의 보고는 연설이 사기를 진작시키고 열광적인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항복한 독일군 병사들.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는 이 연설이 모스크바를 독일 침략으로부터 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극찬했다. 즉, 이 연설 덕분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히틀러의 침략을 모스크바에서 격퇴했다는 얘기다. 1주일 뒤 나치는 모스크바에 대한 2차 공격을 시작했고, 열흘 뒤에는 일부 부대가 모스크바의 남부 교외지역까지 진격하게 됐다. 그리고 그 공격은 12월 5일이 되었을 때 저지됐다. 당연히 이때도 스탈린은 크렘린 궁에 남아 자신의 위치를 사수했다. 포소리가 들려와도 도망치지 않았다. 12월 6일부터 위대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반격을 가하여 이후 나치 군대를 모스크바로부터 250km나 뒤로 몰아붙였다. 72만 명이 넘는 소련의 붉은 군대는 80만의 히틀러 파시스트 군대를 격퇴했다. 소위 무적의 독일군은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 모스크바 전선에서 독일 파시스트들은 5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300대의 탱크, 2,500문의 대포, 15,000대 이상의 차량과 훨씬 더 많은 군수품을 잃었다. 소련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히틀러와 나치들은 전쟁을 시작한 이래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시기 대량생산된 소련군 탱크.

1941년 모스크바 전투의 승리는 반파시스트 전쟁의 실질적인 전환점이었다. 이것은 스탈린의 단호한 의지, 거대한 조직화 능력, 대규모 전략적 문제에 대한 탁월함이 만들어낸 승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탈린의 능력은 독소전쟁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발휘되고 또 빛을 보아 수많은 승리를 기록하게 됐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 물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개)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으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


1941년 독소전쟁이 일어난 이래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도 스탈린의 리더쉽과 소련군의 업적을 인정하게 됐다. 특히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영미 언론들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찬양을 멈추질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이오. 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 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


심지어 더글라스 맥아더도 소련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극찬의 평가를 남겼다.


“소련은 규모와 장엄함 그 모든 면에서, 역사상 최고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소련군을 찬양한 더글라스 맥아더의 발언: 한국의 반공우익들이 그리도 찬양하는 맥아더 장군은 사실 이렇게 소련을 찬양한 적이 있었다.

오즉하면 미군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이었던 어네스트 J. 킹(Ernest J. King)은 소련군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기도 했다.


“미군은 소련 지휘관들의 용맹함과 투지를 칭송하고 있다.”


따라서 독소전쟁 시기 스탈린과 소련군이 세운 공로와 업적은 이후 냉전에서 적이 될 미국 조차 다 인정하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대조국 전쟁을 거치면서 점점 더 유능하고 장군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자가 됐다. 제프리 로버츠는 그 당시의 스탈린을 가리켜 매우 유능하고 대단히 성공적인 지도자였으며,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처칠, 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 그들은 모두 군사 지도자로서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을 정도로 훌륭한 전시 지도자였다는 것이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다. 제프리 로버츠는 전쟁을 거치며 스탈린이 어떻게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스탈린그라드 때부터 쭉 있었던 일은 스탈린이 더 많이 귀를 기울였고, 자문이 좋을수록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뿐 아니라 소련 장군들도 전쟁 1일 차부터 가파른 학습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쓰라린 패배 경험을 통해 장군들은 더 좋은 사령관이 되었고 스탈린은 더 나은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뿐이다.”

1943년 테헤란 회담 당시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이 함께 한 사진.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보인 전시 지도력과 능력에 대해서는 반스탈린 진영에 있던 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인 아이작 도이처도 인정한다. 아이작 도이처가 1948년에 집필한 스탈린 전기의 내용을 보자.

“전쟁 동안 크렘린을 방문한 연합국 인사들은 스탈린이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군사ㆍ정치ㆍ외교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스탈린은 사실상 총사령관이자 국방 장관, 병참 장교, 공급 장관, 외무 장관, 심지어 의전과장이었다. 그는 4년간의 전쟁 시기 내내 하루하루 계속 나아갔는데, 어디서나 존재했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내와 끈기, 경계의 천재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보여주는 사진.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소련이 가장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1942년과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였다. 스탈린그라드는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이 붉은 군대 사령관으로서 백군을 격파한 도시 차리친이었다. 이후 스탈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로 이름 지어졌다. 스탈린그라드 개전 초기인 1942년 8월 독일의 루프트바페는 600대의 폭격기를 포함해 2,000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수만 명의 소련 민간인을 48시간 동안 죽였다. 이후 독일군과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2년 11월 독일군과 추축국 병력들은 스탈린그라드의 90%를 점령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1943년 2월 초 집단 항복했다. 지상 최대의 결전이었던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을 포함한 추축국은 최소 80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소련은 130만 명에서 최도 20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양측 합쳐 최소 100만 명에서 200만 명이 죽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결전이었다. 여기서 소련의 붉은 군대가 승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연합국 쪽으로 유리해졌다.

쿠르스크 전투 상상화: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가 침공한 쿠르스크를 생각하겠지만, 사실 쿠르스크는 과거 소련이 독일의 침략을 무찌른 곳이다.

또 다른 결전은 1943년 쿠르스크에서 일어났다. 아이러니 하게도 2024년 파리 올림픽 말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쿠르스크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한번 전장터가 되었고, 러시아군과 더불어 북한군까지 참전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사실 한국 언론에서 절대다수가 침묵해서 그렇지,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쿠르스크 전투는 동부전선에서의 독일의 마지막 공격 작전이었다. 1943년 7월에 시작된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과 소련 양측 모두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고, 쿠르스크 전역의 일부인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1,200~1,400대가 넘는 탱크가 대규모의 전차전을 벌여 양측의 탱크 수백 대가 파괴됐다. 1943년 8월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쿠르스크 전투는 8월 23일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양측이 투입한 탱크만 해도 1만 대가 넘었으며, 독일은 1,500~2,900대의 탱크가 파괴됐고, 소련은 6,000대 가까이 파괴됐다.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의 진격을 나타낸 지도.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보병을 태우고 거침없이 진격하는 소련군 전차들.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쿠스르크에서의 승리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으로 독일 파시스트 군대에게 타격을 줬다. 1944년 초에는 3년간 지속된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소련의 승리로 끝났고, 1944년 6월 영미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던 시기 소련군은 이른바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여, 대대적으로 동유럽 국가를 해방하는 길에 나섰다. 2달 동안의 군사작전으로 독일군 중 가장 강력했던 동부전선의 주력 사단들이 이 작전에서 소련군에 의해 전멸당했다. 총 25~30개 독일군 사단이 말 그대로 박살났다. 소련군은 총 167만 명의 병력과 5,700대의 전차, 32,718문의 포와 7,800대의 항공기를 투입했고, 작전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사상자(총 18만 명이 전사, 59만 명 부상, 탱크 3,000대 손실)가 나왔지만, 독일군의 피해도 사망, 전사, 실종을 합쳐 총 45만 명이었고, 수백 대 이상의 전차와 1,700대의 중포 및 항공기가 파괴됐다.

제3제국 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꽃은 소련의 붉은 군대 병사. 대조국 전쟁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한번에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진이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 주력 사단을 전멸시킨 소련 군대는 더 나아가 1945년 1월에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해방했고, 1945년 4월에는 베를린으로 진격을 게시하면서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졌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히틀러는 결국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고, 1945년 5월 8일(소련 시간으로는 5월 9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의 승리로 종결됐다. 물론 이 위대한 승리를 이루기까지 소련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을 치렀다.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전쟁으로 국부의 약 1/3이 날아갔으며, 2,700만 명이 사망했다. 이 중 1,000만 명은 군인이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다. 물론 이것은 나치 독일이 소련에서 인종학살과 무차별 파괴 및 살상을 벌인 결과였다.


그러나 독일 파시스트를 포함하여 추축국이 본 군사적 피해는 분명 엄청났다.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베를린 공방전까지 스탈린이 지휘한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궤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국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즉,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는 분명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었다. 문제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속화되며, 이와 같은 역사를 왜곡하는 집단서방이다. 집단 서방은 절대로 이 사실을 가릴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정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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