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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기 Sep 17. 2024

니카라과 친미정권과 미국의 간섭 그리고 혁명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마르크스-레닌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지지자들: 산디니스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니카라과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다.

1979년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다. 바로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두환이 12.12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해도 1979년이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박정희 사망과 전두환의 군사반란 몇 달 전 지구 반대편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사실상 받았던  니카라과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놀랍게도  니카라과 혁명은 과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게바라(Che Guevara)가 쿠바에서 성공시킨 민족해방 혁명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을 가졌다. 이 산디니스타 혁명을 성공시킨 지도자의 이름은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였다. 오르테가는 현재까지도 많은 니카라과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으며, 선거를 통한 집권과 재집권을 반복하면서 현재도 집권 중이다.

중남미 국가 니카라과 위치
아우구스토 산디노

니카라과의 혁명사를 알기 위해선 혁명이 성공하기 이전의 니카라과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 미국은 니카라과를 식민지배했다. 당시 미국은 미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고, 미국의 식민지 지배는 니카라과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인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토 산디노(Augusto Sandino)였다. 그가 반미 구국 항전의 첫 깃발을 든 것은 1926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친미주의 군부 정권을 후원하고 있었고, 산디노는 농업 노동자, 빈농, 광산 노동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다.

니카라과에 주둔했던 미 해병대: 미 해병대는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주둔하며 그곳을 식민지 지배했다.
1920년대 미군의 폭격을 묘사한 그림

산디노의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이자, 미국의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은 혁명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니카라과에 미군 병력을 더 파병했다. 당시 미 해병대가 동원한 전투기들은 게릴라의 해방구로 의심되는 마을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미군의 이러한 폭격으로 최소 수백 명 이상의 니카라과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예컨대 1927년 11월 27일 미 해병대가 폭격한 한 마을에서는 32명의 여성과 11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도합 43명이 폭격으로 학살당했다. 리우스라는 멕시코 만화 작가가 쓴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에 따르면, 최소 300명 이상의 니카라과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미군의 이러한 학살은 니카라과의 혁명 열기를 꺾지 못했고, 초기 2000명 정도의 게릴라는 1931년에 그 규모가 6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산디노의 정의로운 투쟁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의 식민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물론 미국은 자신들의 학살극은 숨기고 치하하면서 산디노의 독립군에 대해선 "약탈자, 살인자, 악마적 투기꾼, 강간자, 피에 굶주림 침략자, 평화와 그리고 민주주의의 적들"로 매도 및 왜곡했다.

좌파 만화작가 리우스의 책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미군은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은 새로운 대통령인 사까사(Sacasa)가 대통령이 되자 철군했다. 당시 산디노는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사까사에게 안전보장을 비롯한 몇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사까사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이는 속임수였다. 산디노는 참모들과 함께, 1934년 2월 21일 밤 모두 사살됐다. 그에 앞서 1933년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해 줄 인물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를 국가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소모사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산디노와 그 참모들을 살해했다. 더 나아가 독립군 전사였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투옥 및 살해했고, 산디노에 협력한 농민들을 체포·탄압했다.


이렇게 되어 니카라과에는 친미 독재자 일당인 소모사가 3대에 걸친 세습을 하는 시대가 열렸다. 물론 형식적으로 소모사는 대통령 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대통령제는 말이 대통령제지 군부권력에 기반한 철권통치였다. 사람들은 북한에서 3대가 세습한다고 욕을 하지만, 정작 미국이 이러한 세습 독재자를 후원했다는 사실과 부패하기 짝이 없는 왕조 세력(사우디아라비아)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후원한다는 사실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식에게 권력을 세습하고 5~10만 명이나 학살한 흡혈귀라는 악명 높은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악행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로 뒤발리에의 경우 온갖 부정부패와 악행 그리고 무능으로 아이티를 최악의 빈곤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며, 반대파를 죽일 때 그 사람의 피 전부를 없애는 악행을 저지른 독재자였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 그는 3대에 걸쳐 독재를 유지했다.

소모사 일가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는데, 1974년 기준으로 이 일가의 재산은 9억 달러였다.  소모사 일가의 엄청난 부의 축적과 니카라과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의 엄청난 외국 투자액에도 불구하고, 당시 니카라과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당시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문맹률은 74%였으며,  60%가 영양실조였다. 전 국민의 50.2%가 문맹이었고, 전 국민의 70%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만 4살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유아사망률은 최소 20% 이상이었다. 영양실조율만 보자면, 당시 소모사 세습 통치의 니카라과는 북한의 영양실조율 (2005년 기준 30% 정도였다)보다 훨씬 더 높다.

산속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들: 이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 맞서 싸웠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본받아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따라서 이런 소모사의 독재 세습 정치는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61년에 등장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andinista)였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산디니스타’는 과거 미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던 아우구스토 산디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즉, 산디노주의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디니스타는 쿠바와 코스타리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과 해방구 그리고 도시에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해 나가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을 결합시켰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소모사 정권은 1967년 수도 마나과 중심가에서 소모사의 선거결과 조작에 항의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400명을 학살했다. 당시 니카라과 정부군은 미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았고, 무장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또한 미국은 고문단 파견과 더불어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4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74년 이후 산디니스타는 두 차례의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소모사 정권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74년 12월 27일에는 미국 대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연회장을 기습하여 미국 대사와 정부 고위관리들을 인질로 삼아, 정치범 석방과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등을 비롯해 산디니스타의 존재와 강령 그리고 대의를 만 천하에 알렸다. 물론 1975년의 경우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산디니스타의 창설자이자 장기인민전쟁 노선을 수립한 지도자 폰세카 아마도르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피해도 막심했다. 이에 따라 산디니스타는 1977년에 이르러 파벌이 3개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장기인민전쟁 노선을 따라 농민들과 연대하는 마오주의 파벌, 두 번째는 주로 공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맑스-레닌주의 파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모든 반정부 세력들과 연대하는 제3의 길 파벌이었다. 이 제3의 길 파벌이 바로 다니엘 오르테가와 그의 동생 움베르토 오르테가가 이끈 세력이었다.

오르테가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산디니스타 지지자들
도시에 입성한 산디니스타 게릴라 전사들: 이들은 십수년 간의 무장투쟁 끝에 1979년 혁명을 성공시켰다.

오르테가 세력의 전략은 1978년 1월 10월 발생한 라프렌사 편집장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암살사건을 계기로 결실을 맺었다. 오르테가 세력은 2월 초 도시들을 공격하고 8월에는 마나과의 국회의사당에서 2천 명에 달하는 인질을 붙잡아 산디니스타의 존재를 니카라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렸다. 소모사는 몸값 50만 달러를 지불하고 정치범 59명을 석방하며 전국민적 봉기를 선동하는 산디니스타의 선언문을 방송하고, 파나마로 이어지는 안전통로를 보장하는 등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며칠 뒤인 9월 마테갈파, 마나과, 마사야, 레온, 치난데가, 에스텔리에서 반 소모사 봉기가 발생했다. 오르테가 세력은 마테갈파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초소를 공격했고, 경무장한 다수의 민간인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마테갈파와 마나과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요새를 포위했다. 9월 봉기는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처참히 진압되었지만, 혁명운동의 고양 속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1978년 12월 8월 산디니스타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세 노선이 각 3인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중앙상임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혁명의 승리를 향한 거보를 내디딜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통일전선 구축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나섰다. 1979년 2월 1일 산디니스타는 진보적인 소부르주아 정당인 독립자유당과 기독교 인민사회당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애국전선을 통해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전진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전투원은 1979년 5월에 5,000명을 넘겼고, 대중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깃발

1979년 6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승리를 향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공세는 단순한 군사 공격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민중 봉기와 총파업으로 국가 방위군 병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자본제 사회의 재생산 과정을 일시에 정지시킴으로써 소모사 독재권력의 물질적 토대를 일격에 붕괴시키고자 했다. 총공세 개시 1개월 19일 만인 1979년 7월 19일, 산디니스타는 수도 마나과에 입성하여 임시 혁명정부를 구성했다. 소모사 3대 세습 독재정권은 물러갔고, 인민을 대표하는 새로운 혁명정부가 니카라과에 탄생했다. 18년간 지속된 내전은 참혹했다. 유엔의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을 통틀어 최소 4만 명 이상의 사망자(5만 명이라는 추산도 있다.), 20만 채의 가옥 파괴, 4만 명 이상의 고아, 75만 명의 기아상태, 100만 명의 난민, 16억 달러의 외채 그리고 국내 전산업의 1/3이 파괴됐다.  이것은  모두 소모사 3대 세습 정권이 벌인 만행이었다. 놀랍게도 1979년 기준으로 니카라과의 인구는 371만 명이었는데, 미국에게 지원을 받던 소모사 정부는 이렇게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것이다. 이에 대한 리우스의 평가를 들어보자.


"이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비로소 행복을 맛보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소모사의 40년 독재로부터, 또한 북쪽의 괴물 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와 니카라과 혁명을 성공시킨 다니엘 오르테가

이렇게 해서 산디니스타 혁명을 최종적인 성공으로 이끈 다니엘 오르테가와 혁명가들은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 소모사 일가와 국가방위대의 고위 지휘관, 정부 고위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은행, 보험회사, 광물, 임업 자원을 국유화했다. 또한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개혁을 시행하여 약 7만 명의 농부들과 약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서 ‘문맹퇴치 십자군’을 조직하고, 많은 의료시설을 설립했다. 미국은 카터 정권 말기부터 로널드 레이건 시기와 아버지 부시 시기까지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온갖 악행과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들이 만든 콘트라 반군이었다. 이렇게 해서 니카라과에선 산디니스타가 집권하자마자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우리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면 수치가 아닐 수 없다.”고 하며, 니카라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주장했다. 이게 바로 지미 카터 정부 시절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실질적인 니카라과 개입은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 이르러서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 2』에 따르면, “산디니스타의 존재를 공산주의의 위협이라고 본, 아니 더욱 중요하게는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오랜 지배에 대한 도전이라고 본 레이건 행정부는 즉시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콘트라 반군 그러니까, 과거 소모사 일당을 돕던 이들을 규합한 세력이 내전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각광받는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추악하고 잔혹한 전쟁을 벌였던 인물이었다.

콘트라 반군은 과거 소모사 독재정권 시절 그 하수인이었던 니카라과 국방군 잔존 세력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들은 니카라과에 침투하여 군사작전 및 테러를 벌였으며, 온두라스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니카라과는 재건과 불평등 해소라는 과제 속에서 미국에 의한 정치공작 및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미국이 남미 니카라과에서 벌인 전쟁은 가장 악랄한 장기적인 전쟁 중 하나였다.


온두라스에 군사기지가 있던 콘트라 반군은 CIA 국장 케이시의 지원을 받으며 정권 탈환 음모를 꾸몄다. 콘트라는 자신들 스스로가 ‘반(反)혁명세력’이라 칭했고, 이를 줄여서 보통 ‘콘트라 반군’이라 불렸다. 케이시 국장은 카터 행정부 시절 초보적인 수준이었던 니카라과 비밀공작을 대규모 작전 차원으로 강화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태스크포스 팀을 꾸렸고, 두에인 클래리지를 라틴아메리카 지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클래리지는 형편없는 인물로 라틴아메리카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그는 현지 활동 경험도 전무했으며, 스페인어조차 몰랐다. 니카라과 주재 미국 대사 앤서니 퀘인턴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과 니카라과 정부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을 1982년이라고 했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 존슨에서 오바마까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앤서니 퀘인턴의 인터뷰 내용이 나온다.


"은밀한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82년 3월 15일이었다. 당시 CIA는 니카라과 요원들을 활용해 니카라과와 온두라스를 연결하는 교량들을 파괴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콘트라 반군
콘트라 반군에 관해 다룬 서적
콘트라 반군을 접견하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레이건 대통령은 온갖 잔혹행위와 전쟁범죄 그리고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세습독재의 산물을 자유투사로 칭송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산디니스타 정부를 대상으로 한 전쟁을 전개하면서 무기 판매를 통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고, 이것이 바로 이란-콘트라 사건이었다. 미국은 당시 이스라엘 무기 거래상들의 도움을 받아 적성국인 이란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미사일을 판매했다. 그리고 그 대금의 일부를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남미 마약조직이 미국시장 진출에 편의를 제공받는 대가로 중개인 역할을 했다. 당시 레이건과 지지 세력들이 벌인 이 사건은 미국 국내법을 철저히 무시하고 벌인 일이었다. 스캔들이 처음 활자화한 시기는 1986년 11월 3일이었다. 레바논의 알 시라지의 특종보도가 미국을 발칵 뒤집었다.

이란 콘트라 스캔들을 풍자한 포스터

당시 미국은 ‘테러국가와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외교원칙을 가졌는데, 이것에 위배되는 사건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부인과 침묵으로 일관하다 ‘알 시라지의 보도는 사실’이라는 이란 당국의 발표가 나오자 변명에 나섰다. 이란으로 무기가 수출됐다는 사실을 부인하던 레이건 대통령은 결국 무기 수출을 인정하면서도 인질 교환의 대가라는 점만큼은 부인했다. ‘이란으로 토우 미사일 몇 대가 넘어갔을 뿐’이라고도 덧붙였다. 물론 레이건의 주장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미국은 이런 불법적이고 기만적인 거래를 통해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이 자금을 통해 마약 거래까지 손을 댔는데, 콘트라 반군이 전세 낸 여객기가 마약을 미국에 내려놓고 무기를 적재한 채 떠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CIA가 조종했다.

미국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올리버 노스: 그는 레이건 정부 백악관 국가안보실 해병대 중령으로서 이란-콘트라 게이트를 진두지휘했다.

레이건 정부 시절 이란-콘트라 사건은 미국이 벌인 최대로 추악한 정치 스캔들이었다. 콘트라는 미국의 자금 지원과 CIA의 지시를 받으면서 조직원이 1984년에 1만 5,000명으로 증강되었다. 더 나아가 CIA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같은 인접 국가들로부터 용병을 모집했으며, CIA와 용병들은 콘트라와는 별도로 니카라과 연안지역 목표물 및 민간 항구에 대한 폭격과 기뢰 투하 등의 방식으로 산디니스타 정부군을 공격했다. 미국의 대통령이던 로널드 레이건은 자신들이 과거 3대 세습 친미 독재정권을 지지한 사실은 망각한 채 다음과 같은 망발을 하며 비밀전쟁을 옹호했다.


"니카라과 국민은 지금 전체주의의 감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은 국민을 빈곤의 나락에 빠뜨려 놓고 특권과 사치를 누리면서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혁명을 확산시키겠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독재정권은 더더욱 위협적인 되었고, 누구도 원치 않는 위험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쿠바와 소련권 그리고 급진 아랍권 조력자들까지 끼어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레이건은 마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폭압적이고 인민억압적인 독재체제라 왜곡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냐하면 미국이 지원한 콘트라 반군은 니카라과 전역에서 소름 끼치는 민간인 학살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니카라과 국내에서 대중적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던 콘트라 반군은 온두라스에서 국경을 넘나들면서 농장과 마을을 습격하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학살하는 잔학행위를 벌였다. 이는 당시 콘트라 반군의 대령출신이던 에드가르 차모르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출석하여 한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산디니스타를 물리칠 수 있는 길은 기관이 다른 나라의 공산당 폭동에서 사용한 진술 즉 살해, 납치, 약탈, 고문 등의 전술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민간인들이 냉혹하게 살해됐습니다. 다른 많은 민간인들도 고문, 사지절단, 강간, 약탈 등의 학대를 받았습니다. 반혁명군에 가담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니카라과인들의 조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콘트라 지원에 대해 비판하는 한 다큐멘터리의 장면: 최소 3만 명의 니카라과인이 미국이 지원한 콘트라 반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콘트라 반군은 테러 전술을 동원해 학교와 병원, 협동조합, 교량, 발전소를 파괴했다. 특히 산디니스타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과정에서 살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3~5만 명인데, 절대다수는 콘트라 반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콘트라 반군의 학살은 너무나도 심각했다. 심지어 니카라과 주재 미국 대사관은 콘트라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인사의 주장을 인용하며, 콘트라 반군이 콘트라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고, 용광로에 넣어 끓여 죽였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콘트라 반군에게 납치된 어린 소녀들이 밤낮으로 강간을 당했다고도 보고했다.

1986년 뉴욕 타임즈에 실린 콘트라 반군의 잔혹행위에 대한 광고기사

1984년에 이르러 인권 단체들에 의해 콘트라 반군이 저지른 상당수의 야만적인 전쟁범죄가 보도됐다. 이와 같은 보고들을 보면 콘트라 반군이 강간, 고문, 살인, 불태우기, 눈멀게 하기, 사지 절단,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참수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산디니스타 정부는 1981년부터 1984년 사이만 하더라도 콘트라 반군이 최소 910명 이상의 주(州)공무원을 암살했고, 8,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1985년에 이르러 콘트라 반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숫자는 13,000명으로 증가했다. 5세에서 60세 노인까지 포함하여 총 21명의 민간인이 죽고, 8명이 부상당한 콘트라군 기습공격에 살아남은 한 16살의 생존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콘트라 반군은 군사작전이 끝나자 트럭에 불을 질렀습니다. 제가 숨죽이며 누워있던 곳에서도 산 채로 불에 타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죠."


그 외에도 히노테가주에서 발생한 콘트라 반군의 무차별 공격에 살아남은 한 생존자도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로자(증언한 생존자 지인으로 추정)는 콘트라 반군에 의해 가슴이 잘렸습니다. 그녀의 가슴이 잘리자, 콘트라 반군은 그녀의 가슴뿐만 아니라 심장까지 꺼내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죠. 남성들은 팔이 부러졌고, 고환이 잘렸으며, 눈알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목이 잘렸고, 그 잘린 틈으로 혀를 빼내어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인질을 끌고 가는 콘트라 반군

이런 극악무도한 콘트라 반군의 잔혹행위를 목격한 생존자들이나 목격자들은 미국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배낭과 텐트, 부츠 등을 보았다고도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콘트라 반군은 산디니스타 정권의 경제를 망치기 위해 공습을 가하여 의도적으로 농작물을 손상시키고, 수확을 방해했으며, 담배를 말리는 건조창고나 곡물 저장고, 관개 시설, 농가 주택은 물론 기계, 도로, 다리, 트럭 등을 의도적으로 사보타주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들은 니카라과의 어업에도 극심한 파괴와 손실을 입혔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50년 동안의 무역 수출액에 버금가는 170억 달러의 경제 손실을 입혔으며, 전쟁 기간을 통틀어 대략 5만 명의 인명이 희생됐다.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써진 티셔츠를 들고 있는 로널드 레이건

결국 소모사 정권으로부터 폐허나 다름없는 니카라과를 물려받았던 산디니스타는 미국의 경제, 군사 개입과 끊임없이 싸웠지만, 1990년 13개의 우익정당이 합당하여 이루어진 친미정당 우노(UNO)에게 2만 표의 차이로 선거에서 패배했다. 산디니스타를 제치고 들어선 친미정권은 1982년 당시의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 대략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사실 이 선거에서도 미국의 개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말 미국의 백악관은 친미 성향의 후보인 비올레타 차모로가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금수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비올레타 차모로는 선거 기간 동안 NED로부터 총 1,100만 달러나 지원받았다.


이 친미정권은 결과적으로 산디니스타가 이룩한 업적들을 차례차례 파괴했다. 친미정권은 모든 국유화된 재산을 사유화했다. 소수의 과두 세력으로부터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한 토지들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었으며, 유상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나눠준 토지들도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예전의 지주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경제정책들은 니카라과의 부패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고, 공공지출 예산을 삭감하여 가난한 민중들이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받게 만들었다. 친미 정권은 대략 17년간 집권했지만,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 모순의 극대화는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산디니스타가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2007년 산디니스타는 다시 선거에 도전했고, 다니엘 오르테가는 선거를 통해 니카라과 대통령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집권을 유지하고 있는 다니엘 오르테가: 일각에서는 장기집권 독재라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빈민들을 우선시하는 좌파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2기 집권기에 베네수엘라와 쿠바로부터 석유와 의사들을 지원받아서 이를 전력생산과 공공의료서비스, 교육시스템 확충에 쓰고 최저임금도 올리는 복지 정책을 부활시켰다. 대통령이 된 다니엘 오르테가는 개헌안을 통과시킨 다음 대통령 선거에 몇 번 출마하든 제한을 두지 않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1년 대선에서 오르테가는 62%의 득표율로 대승을 거두며 3선에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매년 4-5%대의 경제성장을 그럭저럭 이룩하면서도 공공서비스를 확충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 장기집권이나 독재자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복지 정책으로 인한 대중들의 지지율이 높아 2016년 대선에서도 70%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2021년 선거에서도 75%의 득표율로 집권하여 4선에 성공했고, 그리고 현재까지도 오르테가는 니카라과의 지도자로서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산디니스타 혁명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쿠바와 더불어 반미주의적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산디니스타가 집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100년이 넘게 지속된 미국의 간섭과 경제제재 그리고 지배 때문이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한 작은 나라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따라서 미국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니카라과에 있는 반혁명 세력들을 지원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니카라과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앞으로의 산디니스타가 어떤 길로 나아갈지는 확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거 이들이 미국의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듯이 반서방 반미주의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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