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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어?

모성애에 대한 섬뜩한 해석. 영화 <마더>

"와 쟤가 우리 편이라 참 다행이야."

먼 과거에는 전쟁에서, 요즘에는 게임이나 운동 경기, 회사 등에서 가끔 쓰는 표현일 것이다.

성실하고 능력 있으며 같은 편에게 헌신적인 만큼,

적에게는 한없이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저런 표현을 쓰곤 한다.


한없이 든든한 지금 우리 편인 이 사람이, 만약 상대방 편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만약 그랬다면, 도륙 나고 있는 것은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족만큼, 특히 어머니만큼 든든하고 언제나 내 편인 사람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어?깐만?


모성애에 대한 섬뜩한 해석. 영화 <마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살인 누명을 쓴 아들 도준을 구하기 위한 어머니의 사투.


반전 또한 단순하다.

사실은 아들이 살인자가 맞았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전 국민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와 "김혜자"라는 배우에 대한 클리셰를 산산이 조각내 버린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불편함을 넘어서는 불쾌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어머니란 무제한의 사랑을 베풀어 주는 천사일 수 있지만,

그 사랑의 맞은편에서 누군가 자식의 걸림돌이 된다면, 그는 칼을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쯤, 한번 더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어...?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게 맞나...?"




마더는 액체의 흐름을 중심으로 영화를 살펴보면,


한약 썰다가 다친 도준 엄마의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 좋아지는 한약을 먹이고, 그것이 아들 도준의 오줌으로 흐르고,


살인자 누명을 밝히기 위한 엄마의 잠복 중에 생수병에서 쏟아진 물이 흐르고,


피해자 소녀의 코피가 흐르고,


진실을 알고 있는 목격자를 살해한 후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


영화에서 액체의 원류와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면, "원죄"가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로 흘러가는지 보인다.



결국 엄마가 없는 누군가가, 내 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다.


엄마 없어?


물음 뒤에 울음으로 무너지는 도준의 엄마.

어떤 의미의 눈물이었을까.


부모조차 없는 그 누군가는, 도준 엄마에게 울지 마라, 이야기한다.




영화는 뜬금없는 김혜자의 춤(독무)으로 시작해서,


망각의 혈자리에 침을 놓는 순간, 선명했던 김혜자가


노을과 "엄마들"의 단체 관광버스 춤(군무)으로 스며들어버리며 끝난다.

수미 상관.


영화에서 김혜자의 배역이 이름도 없이, "도준 모"인 점을 생각해 봤을 때,

결국 도준 엄마의 그 섬찟함이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고 있는 모두에게로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냥 아름답게 생각하는 모성애.

단방향의 일방적이고 과도한 사랑이 얼마나 섬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지 한 독특한 개인의 것이 아닌

모든 "우리 엄마"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ps.

봉준호의 최고 영화가 무엇이냐 했을 때,

<살인의 추억>, <괴물>, <기생충> 등 너무나도 좋은 작품이 많지만,

나는 단언컨대, <마더>를 가장 최고의 위치에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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