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너는 눈이 부시지만,
나는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드라마 <눈이 부시게>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한국 영화는 <마더>이다. 

다만, 김혜자의 연기가 매우 뛰어남에도 봉준호 감독의 연출이 9할 이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김혜자가 얼마나 위대한 배우인가... 다시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한민국 여배우 중 연기력으로 보았을 때 천우희, 염정아가 현재의 커리어하이라면, 김혜자는 리빙 레전드의 느낌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시고 나서 읽어주시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이야기는 주인공인 "혜자"가 시간을 돌리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에서 시작된다. 시간을 되돌린 책임으로 늙어버린 이후부터 10화까지는... 뭐랄까. 드라마는 시종일관 특이하다. 그리고 유치하다. 

<다크나이트> <인셉션> <신세계> <어바웃타임> 등을 대놓고 패러디하는 우스운 장면들도 나온다. 사실 나는 맥락 없이 등장하는 일회성 개그 장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지나친 판타지 장면들도 싫어한다. 

또한 지나치게 밝은 필터와 카메라 노출로 눈이 부신 정도가 아니라 만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장면들도 있다. 10화의 중반쯤, 나는 이 드라마가 감독의 총체적인 연출 실패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드라마에 몰입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삶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데, 배우가 너무 본인 입으로 읊어대는 것이 교조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너무 고리타분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는 판타지라니... 도대체 뭘까.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하지만 10화의 종반부, 혜자의 거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10분가량을 멍-하니 있었다. 

결국 유치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던 모든 장면들은 다 복선이었다.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의 머릿속 상상들은 감독의 의도로 한 겹 덧씌워진 채로 연출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작은 에피소드들과 큰 줄기의 이야기가 묘하게 이야기를 맞물리며 시청자들에게 하나씩, 느낄 점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나는 <눈이 부시게>의 혜자와, 대배우 김혜자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그러고 보니 배우가 배역이랑 이름이 같잖아...?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눈물 그렁그렁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화 <스틸 앨리스>를 떠올렸다. 

역행성 기억상실. 알츠하이머 치매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잃어가는 최근의 기억들 속에서, 당신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남겨져 있게 될까. 

어떤 사람과 함께일 것인가. 무엇을 후회할 것인가.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고, 또 아파할 것인가.


인생의 끝자락, 가장 행복한 기억 속에 갇힌 혜자의 덤덤한 내레이션은,
결국 모든 순간이 눈이 부셨으며,
모든 삶은 살아갈만한 것이라는,
진부하지만 너무나도 감동적인 진리를 깨우쳐준다.

비록 25살, 행복했던 시절 그 후 비극을 겪은 뒤 고통스러운 삶을 관통해 왔지만, 주인공 혜자는 참으로 행복했음을, 대배우 김혜자의 연기로 우리는 느끼게 된다.




새벽의 쨍한 공기, 꽃피기 전 봄바람의 달큼함, 밥 짓는 연기 속 구수한 노을의 냄새. 

눈물조차도 반짝이는, 찬란하고 눈이 부신 우리네 인생.


여든을 바라보는 대배우가 한참 어린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배우 김혜자에게 건네는 헌사이자, 이 땅에서 삶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미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cTe0jAE-SJ4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