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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식 Dec 15. 2023

새 길을 내다(Way-maker)

내 은사는 "새 길을 내는 것"(way-maker)이다

몇 년 전에 내가 졸업한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선교사를 지망하는 후배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선교사의 은사계발"에 대하여 나눴다. 나처럼 학교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선교를 하는 선교사가 우리 교단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특강 의뢰가 들어왔던 것 같다. 나는 그 수업을 준비하면서 내가 가진 재능들(gifts and talents)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은사들(gifts)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가르치는 것(teaching)"이고 두 번째는 "새 길을 내는 것(way-making)" 혹은 "새 일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사람과 일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net-working)이다. 즉, 나는 교사(teacher), 선도자(way-maker) 그리고 연결자(net-worker)로서의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새 길을 내는 자(way-maker)"로서,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일은 고등학교 때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91년 12월 7일(토)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등불"이라는 기독교동아리를 시작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집을 떠나 학교 근처에 하숙을 했기 때문에 첫 모임도 한 친구의 하숙방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대여섯 명이었지만 이듬해 여름방학에 공주시 문예회관 소강당을 빌려 찬양집회를 열었다. 이후로는 매월 1회씩 학교 인근 교회의 지하기도실에서 야간자습이 끝난 직후인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정기찬양집회를 가졌다. 나는 여기서 찬양인도를 맡다가 고3이 되어서는 설교를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등불"은 25년 가까이 유지되고 지금은 학교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 만나 친구들과 후배들은 몇몇은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두 번째 일은 전경으로 대전의 한 경찰서에서 군복무를 하던 때다. 당시에는 스무 명이 안 되는 대원들이 경찰서 경비와 대간첩 5분 대기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육군처럼 종교생활일 보장되지 않았다. 최소 상경(육군의 상병)은 되어야 혼자 주일에 종교외출을 짧게 다녀오는 것이 관례였는데 나는 감사하게도 일경(육군의 일병)일 때부터 열외선임을 대동해서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줄곧 경찰서 내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내가 근무하던 경찰서는 1급 경찰서로 규모가 컸다. 그 경찰서 안에는 당시 의경으로 구성된 방순대와 기동대가 있어서 전의경의 수가 적어도 300명은 넘었다. 이 일은 내가 수경(육군의 병장)이 되어서 이루어졌다. 새로 온 경찰서장이 크리스천이었는데 어느 날 나를 불러 추친해 보라고 말했다. 1년 전에 신우회 직원에게 했던 말을 전해 듣고 나를 부른 것이다. 나는 내가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과 경목(경찰서 목사)으로 등록된 몇몇 목사님들에게 부탁을 드려, 경찰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매 주일 경찰서 대강당에서 방문하는 교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초코파이도 나눠줬다. 이렇게 나는 군생활을 군종 아닌 군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세 번째 일은 인도에 갔을 때다. 나는 여느 선교사처럼 학부 때의 내 전공(인도어과)을 살려 델리대학교 대학원에 지원을 했다. 이후에 합격통보를 받아서 충분히 학생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델리대학교에서 역사과목 석사를 마친 선배 선교사의 조언을 들으며 생각을 바꿨다. 그 선교사는 공부를 하며 캠퍼스 사역을 하지 않는 이상, 많은 학업양 때문에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도 인도에 있기로 한 10년을 공부하는데만 쓰고 싶지 않아 태권도를 활용하기로 뜻을 정했다. 이런 경우 보통은 태권도학원을 여는데 나는 자금도 없는 데다가 사업을 하는 것에 문외한이라 인도 학교들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신설된 좋은 인도 학교를 만나게 되어 학교 교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로 9년 동안 줄곧 선생님으로 인도에 살면서 선교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내가 만나는 선교사들은 이런 나를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했다. 인도 학교에서 일도 하고 돈도 받으면서, 비자 문제도 해결하고 선교를 한다면서. 

    그리고 지금 나는 인도에서 10년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 "소금교회"라는 새 교회를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고민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기존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청빙을 받아 사역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느 교회의 부목사로서 사역을 할 수 있을까?" 대답은 "할 수 있다!"였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결국 나는 내 은사를 따라 사역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새 길을 내는 방법은  투박하다. 길을 내기 위해 불도저 같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기계치인 나는 그런 것을 사용할 줄 모른다. 나는 그저 길이 없는 곳에 내 두 발을 내딛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을 여러 번 다닌다. 그러다 보면 풀이 죽어 있고 나뭇가지들이 꺾여져 있어서 누군가가 거기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내 사명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은사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런 내 은사를 주셨으니 그 은사를 사용해서 이룰 사명도 주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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