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아내와 나는 3년간 근무했던 헤브론학교(www.hebronooty.org)를 떠나는 송별회에 참석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떠나는 선생님들은 모두 그간의 소회를 밝히고, 보내는 교직원들도 한 두 마디씩 인사말을 건넸다. 이 자리에서 내가 가진 은사가 "배달(Delivery)"라고 말했더니 다들 한바탕 웃었다.
내 기억에 내가 배달을 한 첫 번째 물건은 막걸리였다. 배달보다는 오히려 심부름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지금의 배달서비스도 일종의 심부름이지 않은가. 논에서 어른들이 모내기나 벼배기를 할 때, 막걸리가 종종 떨어지면 어린 나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노란 주전자를 들고 가게에 가면 가게 주인은 땅에 뭍은 독에서 막걸리를 바가지로 떠서 채워주곤 했다. 막걸리가 든 주전자는 어린 내가 한 손으로 들고 논까지 가기에는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중간에 서서 어른들처럼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거나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데고 조금씩 마셨던 그 달고 시원했던 막걸리 맛이 더 생생히 기억난다. 그다음으로 내가 기억하는 배달은 결혼식 청첩장이나 부고를 알리는 봉투를 동네 사람들 집에 나눠주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름이 적힌 봉투를 주시면서 누구네 집이라고 일러주셨다. 그때 동네에 백 가구 정도 산다고 했으니 어른들의 이름을 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동네 구석구석에 사는 어른들의 이름을 알 수 있었고 이후에 어른들이 나누는 동네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막걸리든 경조사 봉투든 초등학생인(당시 국민학생) 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동네 어른들은 기특하게 생각했다.
내가 돈을 받고 본격적으로 배달을 한 것은 중학교 1, 2학년 때다. 당시 정기적인 용돈을 받아본 적도 없고 받을 수도 없었던 나는 신분배달을 해보기로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당시 석간신문인 동아일보 배달지사를 들려 신문을 2시간 정도 돌리고 막차를 타고 집에 가곤 했다. 처음에는 공주 시내(지금의 구시내)에서 신문을 옆에 끼고 돌리다가 자전거를 받고 공주대(당시 공주사대) 인근지역과 공주 교도소까지 신문을 돌렸다. 6개월 정도 신문을 돌리다 보니 가장 멀고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지역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에 월급을 3만 원까지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금액은 배달원들 중에 가장 많이 받는 액수였고 내 구역은 그만큼 힘든 구역이어서 배달을 그만둘 때 인수자를 찾기가 어려워서 결국은 신문배달사를 도망쳐 나왔다. 한 여름에 옆구리에 신문더미를 끼고 비탈진 길들을 오르다 보면 발바닥이 하얗게 부풀어 오르고 물집이 몇 번이고 잡혔다가 터져서 피부가 벗겨지고 굳은살이 배겼다. 추운 겨울에 자전거를 타고 논길을 지나 공주교도소에 다다를 때면 두 손이 꽁꽁 얼어서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한 달에 한 번 받은 2,3만 원의 소중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신문값 수금을 할 때면 신문값에 500원씩 용돈을 얹어주는 분도 계셨고 때때로 여름에는 요구르트를 주는 분도 계셨다. 무엇보다 추운 겨울에 성탄절을 즈음해서 당시 유행이었던 이중장갑을 선물을 받았던 것은 지금도 따뜻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나는 1999년 처음으로 인도에서 6개월을 살다 오면서 본격적인 해외 배달(?)을 하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매년 1, 2회씩 인도를 방문할 때 인도에 계신 선교사님들의 짐을 배달했다. 가능하면 내 짐은 기내짐으로 한정하고 부탁받은 선교사님들의 짐으로 내 수화물을 가득 채웠다. 그 짐의 대부분은 식자재였다. 그렇게 배달을 하면서 선교사님 가정에서 잠도 자고 맛있는 음식도 먹곤 했으니 나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공항에서 수화물 짐이 하나도 없어 탑승수속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보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직업병처럼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 20kg 은 반년 혹은 일 년을 먹을 수 있는 한국음식 식자재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배달은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인도에 살면서도 계속됐다. 뉴델리나 방갈로난 첸나이를 갈 때면 주변 선교사들에게 주문을 받아 한인마트에서 장을 봐서 배달해 주기도 했다. 반대로 내가 살았던 지역인 우띠(Ooty) 지역에서 쉽게 구하는 채소나 쇠고기를 그렇지 않은 곳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배달을 하기도 했다. 헤브론학교에 있으면서 첸나이에서 저렴하게 한국 라면을 구입해서 동료직원들에게 배달하고 학생들이 맘껏 먹게 하거나 종종 로스팅한 커피를 주문받아 커피사업을 하는 동료 선교사에게 배송을 받았다. 가끔씩 헤브론학교를 방문하면 내가 했던 배달 서비스들을 아쉬워하는 소리를 듣는다.
영어로 배달을 "딜리버리(Delivery)"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단순히 물건을 이동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딜리버리"의 대상은 물건뿐 아니라 말(words)이나 사람이 되기도 한다. 말을 "딜리버리"하는 것을 연설이라고 하고 사람을 "딜리버리"하는 것을 "구원한다"라고 한다. 이렇게 보니 나의 은사는 "딜리버리"가 분명하다. 나는 매주 성경을 "딜리버리"하는 설교를 한다. 그리고 나의 직업은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 "딜리버리"하는 목사다. 이 외에도 나는 지금도 사람들을 한국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한국으로 "딜리버리"한다. 다양한 교환프로그램이 그것이다. 한국학생들을 헤브론학교에 데리고 가서 한 달 가까이 머물면서 영어를 공부하게 하고, 헤브론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한국에 데리고 와서 여행도 하고 영어캠프도 연다. 이제는 인도만이 아니라 벨기에와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과 호주에서도 사람들이 온다. 내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러한 "딜리버리"를 계속하는 원동력 중에 하나는 아마도 내가 "딜리버리"를 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위로와 즐거움 그리고 환호가 아닐까 싶다. 먼 타지에서 한국 음식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해 먹야하는 엄마는 내가 배달한 한국 식자재에 큰 시름을 놓았다. 내가 인도로 데려간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들의 십 대에 있어서 인도 여행을 가장 잊지 못할 추억으로 꼽는다. 나를 통해 한국을 다녀간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또 다녀가고 싶어 한다. 내가 초청한 해외 선생님들과 함께 한 영어캠프에 참석한 학생들은 더 이상 외국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어를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일상에 지쳐있고 인생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성도는 내가 배달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용기를 내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10여 년 전에 지도했던 한 형제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은 호주에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는 그 형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면서 10여 년 전에 자신을 지도해 준 내가 자신에게는 생명의 은인과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내 은사가 배달(delivery)이라고 말했다. 송별회에서 내 표현에 한바탕 웃었던 동료들이 나의 설명을 듣고는 모두들 동의하는 듯 보였다. 나는 아마도 이런 내 은사를 죽을 때까지 사용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죽음도 결국 내 영혼을 하나님께 "딜리버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