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딸이 있다. 첫째 딸이자 셋 중에 둘째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인 나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야?"는 질문을 그 형태를 바꿔가면서 성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묻는다. 그 질문을 때론 "아빠는 누가 제일 좋아?"라는 의문문으로, 때론 "나를 사람들이 과대평가하는 것애!"라는 평서문으로 그리고 "힘들어!"라는 감탄문으로 던진다. 작년 일이다. 둘째가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해서 숙소 정원에 걸어 나가 벤치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둘째는 자신감도 떨어져서 무기력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둘째가 자기 스스로를 너무 비하하지 않고 사랑하며 자신감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둘째가 가진 장점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둘째는 질문을 참 잘한다(an excellent questioner).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둘째의 첫 질문은 동생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먹을 때니 둘째가 30여 개월정도 됐을 때다. 둘째는 나와 함께 발가벗고 씻으면서 "아빠는 왜 쭈쭈가 있어?"라고 질문을 했다. 엄마는 동생인 아가한테 젖을 먹이느라 쭈쭈라 있는데 아빠는 젖도 안 먹이는데 왜 쭈쭈가 있냐는 뜻이었다. 이런 질문하는 습관은 둘째가 다섯 살 때 인도에 살기 시작하면서 영어를 습득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세 아이들에게 영어 애니메이션을 보여줬을 때, 첫째는 화면을 보며 상황 속에서 대사의 의미를 파악하는 반면, 둘째는 "뭐라고 말하는 거야" 하며 매번 나한테 묻곤 했다. 매번 답을 해주지 않으니 답답해 했고 영어를 말하는 것도 더뎠지만 둘째는 한 번 익히 단어나 표현은 결코 잊지 않았다. 요즘은 사람들과 인생에 관심이 많은 지 철학적이거나 사회적인 질문을 하곤 한다.
둘째가 가진 두 번째 장점은 생각이 깊다는 것이다(a deep thinker). 둘째의 질문들은 남들보다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 사물에 대한 관찰은 상세하고(in detail) 질문에 쓰이는 단어들은 적확하다(accurate). 둘째가 초등학교 4학년 즈음에 이미 내 영어 실력을 넘어섰으니 둘째가 사용하는 영어 단어들에 대해서 내가 평가하기가 어려워졌다. 다만 가끔씩 한국어 어휘들을 사용할 때 그 적확성(appropriate) 때문에 놀랄 때가 있다. 둘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국어 단어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새롭게 알게 된 단어와 표현을 지금도 적는다. 단어를 정확히 그리고 적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분석적인 사고 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적 사고는 "왜" 혹은 "어떻게"라는 사고 훈련이 없이 길러지지 않는다. 둘째의 사색 능력은 세밀한 관찰과 분석적 사고로 키워진 것이다.
둘째가 가진 세 번째 장점은 독서 능력(an excellent reader)이다. 둘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독서를 즐겨하지 않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엄마에게서 왔다. 잠들기 전에 세 아이가 각각 한 권씩 책을 가지고 오고 아내는 그 책들을 다 읽어주었다. 세 아이들은 항상 "한 권만 더~" 하면서 졸랐고 아내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늘 연장되곤 했다. 나도 종종 책을 읽어 주었는데 둘째와 단 둘이 낮에 책을 읽을 때의 일이다. 둘째는 내가 책을 읽어나가다가 자신이 어디선가 본 표현이나 그림이 있으면 "잠깐만!"하고 나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책장에서 유사한 표현이 있는 책을 찾아와서 "여기도 있어!" 하며 보여주곤 했다. 글을 읽을 줄 알고부터는 밤에 이불을 덮고 손전등을 켜 들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아서 아예 손전등을 뺐기까지 했다. 둘째는 지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한강 작가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둘째의 영어나 한국어가 탁월해지는 데는 독서 능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둘째가 가진 네 번째 장점은 인내심(perserverence)이다. 둘째는 때때로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스트레스와 걱정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스트레스나 걱정이 아니다.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점(standard) 혹은 기대치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둘째는 미술을 공부하면서 본인이 뛰어넘기 힘든 스트레스 때문에 고전분투를 했다. 부모인 우리는 미술에 둘 다 재능이 없는 터라 둘째의 스트레스를 다 공감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둘째가 산고 끝에 완성한 작품들을 보며 탄성을 내곤 한다. 나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리고 그 디테일을 채우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나는 둘째가 이 인내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가 한국에 돌아오면서 아내는 본격적으로 니터(knitter)의 세계에 빠졌다. 작년에 내 생일 선물로 줄 스웨터를 만들면서 한 달 동안 끈기 있게 니팅(knitting)을 하는 모습을 보니 둘째의 인내심도 엄마에게서 온 것 같다.
둘째가 가진 다섯 번째 장점은 공감 능력(empathy)이다. 둘째는 어렸을 때부터 울음이 많았다. 어느 날 우는 데 눈물이 만화에서나 보듯이 감은 눈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웃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는 둘째는 엄마 아빠에 대한 리액션(reaction)이 제일 좋았다. 둘째가 가진 감성은 책을 읽으면서 더욱 발달했다. 김훈 작가의 "개"라는 소설을 엄마가 읽어 주는데 불쌍한 결말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에게 찾아와서 "아빠! 가슴이 너무 아파!" 하며 울었다. 나는 가슴을 가리키며 가슴의 어느 부위가 아픈지를 물었다. 그런데 둘째가 표현한 가슴은 "마음"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말을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해서 웃으면서 안아준 기억이 있다. 그때도 책을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의 공감 능력은 단순히 정서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성적표를 받아와서는 울고 있어서 물었더니 A가 나오지 않은 한 과목 때문에 엄마 아빠가 실망할까 봐 울었다고 했다. 우리는 둘째가 행복한 것을 엄마아빠가 제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기특한 마음이라 여겼다. 이제 대학 진로를 고민하면서도 부모의 형편을 헤아린다. 그런 둘째에게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라고 권한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으로.
이 밖에도 둘째가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a good listener)는 이야기도 그날 해주었던 것 같다. 둘째는 그날 끝까지 고민거리를 내게 내놓지 않았다.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한 것 이외에는. 하지만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걸어오는 길에 내 팔짱을 낀 둘째의 팔에는 이전보다 더욱 힘이 느껴졌고, 아빠에게 건네는 목소리는 한결 경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