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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비극, 그 빛을 마주한 한 인간의 고뇌

뮤리컬 <마리 퀴리> 리뷰

by 이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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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리 퀴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인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의 삶을 그린다.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천재,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새로운 원소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자. 우리에게 익숙한 그녀의 화려한 업적 뒤에 가려진 고뇌와 선택의 순간을 무대 위로 생생하게 불러온다.


2020년 초연 이후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 5관왕을 휩쓸고, 마리 퀴리의 고국 폴란드는 물론 일본, 그리고 뮤지컬의 본고장 영국 웨스트엔드까지 진출하며 작품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이 자랑스러운 창작 뮤지컬이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과학이라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소재를 어떻게 이토록 뜨거운 감동의 서사로 풀어냈을까. 그 답은 무대 위에 오롯이 존재했다.



'마리 퀴리' 그 자체가 된 배우, 김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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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막이 오르고 마리 퀴리로 분한 김소향 배우가 등장한 순간, 객석의 공기는 달라졌다. 그녀는 단순히 마리 퀴리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희열, 이민자이자 여성 과학자로서 겪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의 발견이 초래한 비극 앞에서 무너지는 한 인간의 처절한 고뇌까지. 김소향은 '마리 퀴리'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되어 무대를 장악했다.


그녀의 폭발적인 성량은 때로는 단단한 확신으로, 때로는 애절한 절규로 객석을 가득 채웠다. 특히 곱고 맑은 음색으로 시작해 클라이맥스에서 터져 나오는 가창력은 관객의 심장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후, 커튼콜에서 관객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폴더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뭉클함 그 자체였다. 무대와 관객, 그리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 관객은 기립박수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 이야기가 아닌, 여성들의 단단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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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리 퀴리>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두 여성의 우정과 연대를 중심 서사로 끌고 간다는 점이다. 마리 퀴리가 라듐 공장의 직공 '안느 코발스카'와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거대한 진실을 위해 함께 싸우는 과정은 그 어떤 로맨스보다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한 명은 저명한 과학자, 다른 한 명은 평범한 노동자.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한 두 사람은 '라듐'이라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연결된다. 사회적 약자였던 두 여성이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는 모습은, 진정한 연대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 피에르와의 관계가 과학적 동지이자 지지자로서 그려지는 것 또한 이 작품이 가진 건강하고 진취적인 시선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과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눈부신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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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라는 딱딱한 소재를 이토록 아름답고 시적인 무대로 구현해냈다는 사실은 놀랍다. 특히 극 중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진자 운동'의 시각적 연출은 압권이다. 처음엔 불안하게 흔들리던 여러 개의 진자가 마리 퀴리의 내면이 단단해지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감에 따라 점차 하나의 안정된 움직임으로 수렴된다. 이는 그녀의 심리 상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과학적 원리가 어떻게 한 인간의 삶과 조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환상적인 연출이었다.


또한, 라듐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초록빛은 무대 전체를 감싸며 황홀경을 선사한다. 그 빛은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희망의 빛이자, 동시에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빛이기도 했다. 이 양면성을 무대 위에 아름답지만 서늘하게 구현해낸 디테일은 극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마리 퀴리>를 봐야 하는 이유

이 작품은 폴란드인,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짊어진 마리 퀴리가 수많은 장벽을 뚫고 학자로서 우뚝 서는 성공 서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한 약자의 성공 신화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위대한 발견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과학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예측할 수 없는 건 행운이 아니라 재앙이야."


자신이 발견한 라듐의 유해성을 알게 된 후 고뇌하며 내뱉는 마리의 대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 뮤지컬 <마리 퀴리>는 한 위대한 과학자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간직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물과 전율, 그리고 묵직한 질문을 남기는 무대.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와 가슴을 울리는 음악, 그리고 진정한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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