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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카페에서 자리를 뺏겼다

양보하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이유

by 이소희



카페에서 몇 없는, 집중하기 좋아 보이는 1인 독서실 자리가 비었다. 쟁반을 들고 그곳으로 향하는 찰나, 옆에서 나타난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무언의 압박과 경멸이 뒤섞인 눈빛과 함께 "제가 먼저 왔는데요."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황스러움과 불쾌함이 동시에 치밀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이 사람과 싸우면 정말 큰 소리가 오가겠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스쳤다. 나는 이내 쟁반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앉으세요.” 그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때까지, 그의 눈에는 ‘당연한 걸 이제야 아느냐’는 식의 짜증이 가시지 않았다.


카페를 나와 한참을 걸었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배고픔도 잊은 채 억울함에 발을 옮겼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이런 무례함을 감수해야 하지? 속상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조용한 공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 날카로운 갈등을 피하고 싶었던 나의 선택은 정말 최선이었을까. 내 기가 쎄지 못한 탓일까.


한참을 걷고 나서야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왜 그 작은 자리 하나로 이 소중한 주말 오후 시간을 날리고 있는 거지? 그 자리 하나에 그토록 날을 세워야 했던 그 사람은, 과연 ‘승리’의 기쁨을 온전히 누렸을까. 어쩌면 그 격양된 얼굴 뒤에는 단 한 뼘의 마음의 여유도 없는 조급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순간의 양보는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힘을 단단히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사소한 갈등 앞에서 기꺼이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는 선택은, 실은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한 능동적인 행위였다.


양보는 단단한 중심을 잡고 있는 내면에서 나온다. 사소한 승리에 집착하지 않아도 내 가치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면 양보는 자연스레 우러나온다. 타인의 공격성에 즉각 반응하며 맞서는 것은 어쩌면 쉽다. 하지만 그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힘은, 역설적으로 단단한 자기 중심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더하여, 양보의 순간은 나를 '감정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킨다. 내가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그와의 연결은 그 자리에서 끝났다. 하지만 만약 싸움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갈등을 일으키고 큰 상처를 냈을 것이며 그 불쾌한 감정은 몇 시간, 어쩌면 며칠 동안 나를 괴롭혔을 것이다. 한 걸음의 양보는 나를 분노와 적대감이라는 소모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렇게 확보한 내면의 자유와 평온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양보가 미덕이 될 수는 없다. 나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당하거나 법적, 윤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일에는 단호히 목소리를 내고 싸워야 한다. 그 누구도 호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카페 자리, 지하철 좌석, 붐비는 버스 정류장 줄 서기처럼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소한 갈등의 영역이다. 동료의 작은 실수를 너그러이 이해해주거나, 고객센터 직원의 고충을 이해해 주는 것과 같은 작은 태도 말이다.



이러한 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태도는 결국 보이지 않는 ‘신뢰의 자산’을 만든다. 내가 뱉은 너그러움은 언젠가 다른 형태로 나에게 돌아온다. 일상 속 작은 양보의 경험은 언젠가 내가, 혹은 나의 부모님이나 친구가 배려를 받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차선을 양보해 주는 운전자가 자신도 많은 양보를 받아 수월하게 차선변경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처럼 공격적으로 운전대를 잡는 사람은 매일 도로 위에서 욕설이 오갈정도로 싸움이 붙는다고 한다.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못된 말을 했다면, 그 부정적인 에너지 역시 결국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당장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관계와 공동체의 평온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서로를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이 된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사회는 거창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될 때,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곧 그런 사회가 되는 것이다.


여유롭게 살자, 푸바오처럼


결국 이것은 ‘삶의 미학’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모든 사소한 전투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니면 사소한 것은 너그럽게 품을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양보는 단순히 무언가를 내어주는 행위를 넘어, 나의 품위와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인간적인 선택지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배려이기 이전에, 가장 먼저 나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지혜다.


그날 나는 자리를 잃었지만, 평온함과 하루를 지켜냈다. 어쩌면 그 카페에서 진짜 이긴 사람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이 마주할 작은 갈등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용기를 낸다면, 그것은 결코 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길 바란다. 당신의 그 작은 양보가 당신의 하루를,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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