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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느 Sep 17. 2024

TV 시청 금지

그녀의 TV 사랑은 대단했다.

TV를 켜면 온갖 재미난 것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요술공주 밍키, 은하철도 999, 호호 아줌마, 꼬마자동차 붕붕, 빨강머리 앤, 달려라 하니,

밖에서 뛰어놀다가도 만화가 시작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뛰어 들어와 TV 앞에 경건한 자세로 앉는다. 광고가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주제가가 나오기 시작하면 목청껏 함께 부른다.

드디어 시작된다!

TV 속에 빨려 들 것 같이 집중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오늘의 이야기는 너무 짧게 끝이 난다.

뭐 그래도 괜찮다.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의 만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TV만화는 그녀에게 기쁨이자 위로였으며 그녀가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외화시리즈 또한 놓칠 없는 재미였다. V, 전격 Z작전, 출동 에어울프, 맥가이버, 600만 불의 사나이..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완전한 신세계였다.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얼마나 발전된 나라일까?

배우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아름다웠고, 행동은 세련되었으며, 그들이 지니고 사용하는 제품들은 평생 못써볼 만한 것들 뿐이었다. 그들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 그 자체였다. 찬란하게 빛나지만 절대 손 닿지 못하는 곳에 있는 존재. 그들이 꿈에도 나올 정도로 열성적으로 챙겨보다가... 눈이 나빠졌다.




수업 시간 칠판도 흐리게 보이고 책을 보아도 전처럼 글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도로 표지판과 상점의 간판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떠보기도 하고, 크게 떠보기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눈이 더욱 불편해진 것 같이 느껴진 것은 같은 반 혜정이가 안경을 쓰고 오는 날부터였다. 안경 쓴 혜정이는 전과는 다르게 지적이고 똑똑한 아이처럼 보였다. 안경을 벗어 닦는 모습조차도 그 아이만이 가진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나도 안경을 쓰면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될 것 같았다.


아빠께 용기 내어 말씀드렸다.

"아빠 나 눈이 잘 안 보여요. 칠판에 글자도 잘 안 보여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고, 가게 간판도 잘 안 보여요."

아빠는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쳤다.

신문의 작은 글씨를 가리키며 이것 좀 읽어봐라, 좀 떨어져 앉아 읽어봐라, 거기 서서 달력의 작은 글씨 읽어봐라 등. 알 수 있을 것 같은 글자도 찡그리며 잘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던 아버지 입에서 드디어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 나왔다.

"안 좋은 눈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 내일 안과에 가보자."

'앗싸!'


다음날,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 도착한 곳은 자동차와 건물이 빽빽한 큰 시내의 김동인 안과였다. 아이 손님은 혼자라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시력검사를 했다. 간호사의 지시대로 매우 솔직하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니 시력 양쪽이 0.7이란다. 여기서 관리를 잘못하면 더 나빠질 수 있으니 TV를 가까이서 보거나 너무 많이 보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안경은 맞추지 않고 다시 여러 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저녁시간에 아빠가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얀느가 눈이 나쁘다고 한다.

TV를 많이 봐서 눈이 나빠진 것 같으니 얀느는 오늘부터 1년간 TV 시청을 금지한다.

얀느 혼자 TV를 안 보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가족 모두 TV를 보지 않기로 한다!"

어머나 세상에 이. 럴. 수. 가!!!

그녀가 사랑하고 동경하고 흠모하던 TV를 못 보게 된다니. 안경을 쓰고 싶은 열망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 너 때문에 TV 못 보게 되었잖아! 괜히 눈은 나빠져가지고... 네가 알아서 적당히 봤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세상을 다 잃은 듯 너무나 슬픈데 식구들의 날카로운 비난은 그녀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그들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아빠는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는다. 반항해 보았자 폭풍, 아니 허리케인이 올지 모른다.


그날부터 그녀의 집에서는 TV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뉴스 소리를 제외하여,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아빠가 외출하면 안방에 모여들어 TV를 틀었다. 당연히 그녀는 안방 출입 금지였다. 혼자 다른 방에 있는 것은 무섭고 외롭다며 함께 있게 해달라고 그녀는 식구들에게 사정사정하였다. 약간의 인정이 남아있던 그들은 '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TV 화면을 보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외롭고 무서움은 무슨.. 소리라도 듣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아무런 변수 없이 정말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김동인 안과에 다시 갔다. 그녀의 양쪽 시력은 놀랍게도 1.5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아빠는 TV 금지령 해제를 선포하였다. 단, 1.5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는 조건하에 말이다. 그녀는 물론 식구들이 모두 환호했다. 몰래 보느라 힘들었는데 당당하게 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으니. 88 서울 올림픽이 다시 시작된 것처럼 모두가 다시 얼싸안아 마음껏 기뻐하였다.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그렇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TV를 틀었다.

그러고는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광고음악이 흘러나온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던가.

정말 그리웠어. 너무 행복해!


신기하게도 그 후 아무리 눈을 혹사시켜도 그녀의 시력 1.2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힘든 시기를 겪으면 마음이 단단해진다고 하던데 그녀의 시력도 고난의 1년을 보내며 단단해졌던 것일까?

녀는 그 1년 덕분에 단단한 시력을 얻었고, TV와 맞먹는 매력을 가진 또 다른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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