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무척 예쁜 아이였다고 한다. 얼굴이 하얗고 키가 또래보다 한 뼘이나 크며 항상 단정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아이. 엄마 손을 잡고 걷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아이가 참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꼬집었다. 쑥스러움이 많던 나는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불안하기만 했는데 엄마는 그럴 때마다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내지으며 '어서 감사합니다 해야지.' 재촉했다.
정말 싫었던 것이 있었다. 유치원 가는 길목을 매일 아침 지키고 있던 동네 노총각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과한 제스처로 달려와 반갑다며 안아주었다. 언니와 함께 등교를 하는데도 유독 나에게만 그랬다. 80년대 시골에서 미국 스타일 허그라니! 어린 나이에도 노총각 아저씨의 행동은 느끼해서 마주하기조차 싫었다. 언니를 졸라 10분이면 갈 유치원을 20분 걸려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다음으로 싫었던 것은 나의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이었다. 매일 아침 큰언니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머리를 만져주었다. 양 갈래 땋기, 지네 머리, 쌍지네 머리, 한 올이라도 빠질 새라 쥐어짜 하늘 높이 올려 묶은 포니테일 등.. 아침에 묶은 머리를 하루 종일 유지하려면 모발을 두피로부터 최대한 당겨서 꼬고 고무줄로 고정시켜야 했다. 스프레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시골이었다.
"엄마, 아파요!", "엄살도 참!", "언니들처럼 그냥 짧은 머리면 좋겠는데..", "아침마다 공들여 머리해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인형머리 매만지듯 머리를 꼬고 당길 때마다 두피 통증은 참기가 힘들었다. 툭하면 엉키는 머리카락을 일자 빗으로 빗을 때는 어떻고. 매일 맞이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고, 얘기해 봤자 엄살이라고만 하니 나는 무기력하고 조금 우울했다.
일곱 살의 나에게 이 모든 것이 나의 '예쁨'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매들은 모두 짧은 커트나 단발을 유지했는데 유독 나만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도, 자매들과 어딜 가도 사람들이 나에게만 볼을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아침마다 공포를 안겨주는 아저씨도, 다 내가 예뻐서 일어난 불행인 것 같았다.
어느덧 유치원 졸업을 앞두어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줄지어 서있다가 차례가 되면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앞에 줄 선 친구들의 긴장한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긴장되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이 예쁜 얼굴이 사진으로 남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굳게 결심했다.
"자! 웃으세요!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불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나는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그리고 그 얼굴이 그대로 유치원 졸업앨범에 박제되었다. 졸업사진 속 그 얼굴은, 내가 느꼈던 불편함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참 많이 예뻐해 준 기억이 있다. 넘치는 표현이 불편해 슬슬 피해 다녔던 동네사람과 친척들도 떠오른다. 집안 분위기, 소심한 성격 탓에 타인을 향한 불편함은 드러내지 못했고, 그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던 탓에 훈장 같은 졸업사진이 남게 된 것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졸업사진 찍을 당시의 비장한 마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낮은 자존감에 소심했던 아이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잘 자랐다.
졸업앨범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내 기억의 증거가 사라지니 참 아쉽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아빠도, 엄마도, 앨범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버린 지금, 내 기억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겁났다. 흐린 기억들을 꺼내어 먼지 탈탈 털어주고 뽀송뽀송 말려 잘 정리해 주는 작업, 이것이 다시 오지 않을 내 지난날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자 예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