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오늘도 나의 시간만 너무나도 더디게 간다 . 파랗기만 한 하늘과 너무나도 느린 시간 사이에서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집에 와보니 아빠가 안방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엄마는 외출 중이라고 했다. 적막한 집안에 간간이 신문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고요 속에 가만있자니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가서 가위를 들고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부탁이 있어요."
"뭔데?"
"이것으로 제 머리 좀 잘라 주세요."
"........?"
신문을 보던 아빠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아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머리가 엉덩이까지 길었는데 이러다가 바닥까지 길 것 같아요. 엄마는 아마 그럴 생각인 것 같은데 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엄마께 여러 번 말씀드려 봤는데 안된다고만 하세요. 이제는 정말 잘라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머리 감는 것도 힘들고, 아침마다 머리 하는 것도 너무너무 아프고요."
"이 긴 머리를 자르면 아깝지 않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엄마가 싫어하실 텐데."
"그래서 아빠께 부탁드려요."
아빠는 나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굉장히 가부장적인 데다가 완벽주의자였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아 나는 항상 아빠 앞에서는 조심해야 했고 긴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정말 크게 용기를 내어 말한 것이었다. 아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가위 좀 줘봐라."
"여기요!"
이 때다 싶어 가위를 냈다. 그날 나는 한 올이라도 삐져나올까 바짝 당겨 하늘 높이 올린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두피의 통증을 유발하면서 기세 등등하게 묶인 머리카락을 보면서 아빠는 말씀하셨다.
"돌아 앉아 봐라."
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한 손으로 포니테일의 중간 부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윗부분을 싹둑싹둑 잘라냈다.
'머리를 풀지 않고도 이렇게 간단히 자를 수도 있는 거구나.' 감탄이 나왔다. 어느새 아빠의 손에는 뭉텅이로 잘린 나의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니 왠지 무서워져 소름이 돋았다.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거울을 보니 앞모습은 그대로인데 고개를 돌리니 댕강 잘려 짧아진 포니테일이 있었다.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더 짧으면 좋을 것 같아 아쉽기는 했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엄마는 내 머리를 보고 뭐라 하실까?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상상만으로도 너무 재미나서 마당으로 나가 엄마를 기다렸다. 마당 구석에 앉아 열 지어 지나가는 개미 행군을 구경하고 있을 때 드디어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나 머리 잘랐어요!"
아주 자랑스럽게 댕강 자른 머리를 내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네가 잘랐냐? 어떻게 된 일이냐!"
깜짝 놀라 달려오는 엄마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빠! 아빠가 잘라준 거예요!"
아빠는 허허 웃으며 애가 하도 간절하게 원해서 잘라주었다고 둘러댔다. 다행히 엄마의 잔소리는 길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뿌듯했다. 아빠를 나의 편으로 만든 것에 대하여, 그 사람이 나의 편인 것에 대하여.
그날 이후 아침마다 반복되던 나의 고통은 막이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엄마가 나의 짧아진 머리를 가지고 더 이상 실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너는 머리카락이 생명인데 그걸 잘랐으니.."
엄마의 한숨은 어쩐지,
딸의 머리를 만져주는 엄마의 소소한 즐거움을 빼앗긴 것에 대한,
딸을 데리고 나설 때 사람들의 시선에 으슥함을 빼앗긴 것에 대한,
유순한 딸이 발칙하게 가위를 들고 아빠를 찾아갔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이 뒤섞여 깊은 한숨이 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엄마의 허전함 따위는 상관없이 그 일로 나는 하늘을 날듯이 기쁘고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존재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