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을 잡고 걷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예쁜 아이'라며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꼬집었다.
쑥스러움이 많던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거는 상황이 어색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는데
엄마는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내지으며 나에게 '어서 감사합니다' 말하라 재촉했다.
정말 싫었던 것이 있었다.
유치원 가는 길목을 매일 아침 지키고 있던 동네 노총각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과한 제스처로 달려와 반갑다며 가벼운 포옹을 하였다.
언니와 함께 등교를 하는데도 유독 나에게만 80년대 시골에서 미쿡 스타일 허그라니!
어린 나이에도 노총각 아저씨의 행동은 아주 느끼하고 마주하기 싫은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싫었던 것은 나의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이었다.
매일 아침 큰언니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머리를 매만져주었는데 양 갈래 머리, 지네 머리, 쌍지네 머리, 한 올이라도 빠질 새라 쥐어짜 하늘 높이 올려 묶은 머리, 꽉 묶어 꽈배기 머리.. 아침머리를 하루종일 유지하려면 모발을 두피로부터 최대한 당겨서 꼬고 묶어 고무줄로 고정시켜야 한다.
"아, 아파요!"
"엄살도 참!"
"언니처럼 그냥 짧은 머리면 좋겠는데.."
"아침마다 공들여 머리 해주는 것도 감사한 줄 알아라."
그들이 인형놀이 하듯 머리를 꼬고 당길 때마다 두피 통증은 참기가 힘들었다.
툭하면 엉키는 머리카락을 일자 빗으로 빗을 때는 어떻고.
매일 맞이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고
얘기해 봤자 들어주니 않으니 나는 무기력하고 조금 우울했다.
일곱 살의 나에게 이 모든 것이 나의 '예쁨'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매들은 모두 짧은 커트나 단발을 유지했는데 유독 나만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도,
언니와 함께 어딜 가도 사람들은 나에게만 볼을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아침마다 공포를 안겨주는 아저씨도,
다 내가 예뻐서 일어난 불행인 것 같았다.
어느덧 유치원 졸업을 앞두어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줄지어 서있다가 차례가 되면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앞에 줄 선 친구들의 긴장한 모습을 보니 나도 긴장되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이 예쁜 얼굴이 사진으로 남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굳게 결심했다.
자! 웃으세요!
하나!
둘!
셋!
'찰칵!'
한껏 찡그린 얼굴이 유치원 졸업앨범에 박제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참 많이 예뻐해 준 기억이 있습니다.
넘치는 표현이 불편해 슬슬 피해 다녔던 동네사람과 친척들도 떠오르고요.
집안 분위기, 소심한 성격 탓에 타인을 향한 불편함은 드러내지 못했고,
그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던 탓에 훈장 같은 졸업사진이 남게 된 것이지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졸업사진 찍을 당시의 비장한 마음은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그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낮은 자존감에 소심했던 아이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잘 자랐답니다.
졸업앨범을 아무리 찾아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기억의 증거가 사라지니 참 아쉽고 쓸쓸한 생각이 들더군요. 아빠도, 엄마도, 내가 태어나 자란 집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씩 하나씩 결국 모두 사라진 지금, 내 기억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겁이 났습니다. 나는 분명 존재하고는 있지만 나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헛헛함이 들어 글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흐린 기억들을 꺼내어 먼지 탈탈 털어주고 뽀송뽀송 말려 잘 정리해 주는 작업, 이것이 다시 오지 않을 내 지난날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자 예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