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토요일 7시, 가족회의 시간입니다!
닫혔던 방문들이 열렸다. 소파 앞에서 하루종일 떠들던 TV도 조용해졌다.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회의 호스트이자 이 집의 엄마인 내가 입을 열었다.
'지난 몇 달간 우리 가족이 서로 비난하며 얼굴 붉히는 일이 자주 있었어. 심지어 남의 마음 아프게 하는 일까지 생겼고.. 누구의 잘못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야.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은데, 이것을 나만 느끼는 건지 다 같이 모여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모이자고 한 거야.'
곧이어 A4 한 장씩 구성원들에게 나눠주었다.「김가족 가족회의」라고 적힌 질문지였다. 회의 제목은 우리 네 식구의 성을 따서 지었다.
'간단한 설문지라고 생각하고 15분 정도 생각하면서 적어줘.'
식구들은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빠: 필요성은 이해해. 말로 하면 되잖아. 굳이 적어야 해?
첫째: 여기가 학교야? 집에서까지 활동지 써야 해? 나 안 적어!
내가 얼마나 고민하면서 만든 건데.. 반드시 이 질문지를 쓰고야 말리라는 의지를 눈에 가득 담고 레이저 한번 쏘아주었다. 남편과 둘째는 마지못해 빈칸을 채워나갔고 첫째는 머릿속에 다 있어서 적을 필요 없다며 끝까지 볼펜을 들지 않았다. 역시 강적이다.
이 자리는 가족의 화합을 위하여 마련된 자리입니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하여 지켜주세요.
* 서로 비방하지 않기
*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
* 아무런 편견 없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 장난치거나 성의 없는 행동 보이지 않기
* 가식 없이 솔직하게 임하기
1. 여러분이 생각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은 어떤가요? 어떤 가족의 모습을 바라나요.
1-1. 내가 바라는 가족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2. 올해 개인적(가족이 함께)으로 하고 싶은(이루고 싶은) 일
2-1.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
3. 가족에게 바라는 점
-아빠:
-엄마:
-첫째:
-둘째:
3-1. 3번 대한 나의 답변, 앞으로의 각오
4. 한 달에 한번 가족회의를 매달 두 번째 토요일에 하는 것에 동의합니까.
질문 1번 여러분이 생각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은 어떤가요? 어떤 가족의 모습을 바라나요.
불편하다. 자주 싸운다. 우리 가족이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안 싸우면 좋겠다.
예상대로 식구들에게 우리 집은 마음 불편한 곳이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언쟁하는 일이 많으니 집안 분위기가 냉랭할 수밖에. 주로 언쟁은 사춘기 아이와 엄마, 그리고 올 들어 아이와 아빠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런 분위기를 인지하고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회의는 성공일 것이다.
질문 2번 올해 개인적(가족이 함께)으로 하고 싶은(이루고 싶은) 일
아빠가 삿포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에 모두 질세라 삿포로는 겨울에 가야 하는데.. 추운 거 싫은데. 싱가포르 어때? 아니 아니 하와이, 가는 김에 유럽을 가야지. 한 마디씩 거둔다. 우리 식구는 여행 케미가 잘 맞는 편이다. 집 떠나는 상상에 회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던 엄마의 마음은 '해외여행은 무슨...'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날짜, 학교, 예산 등을 생각해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추려 다음 달 가족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질문 3번 가족에게 바라는 점
-아빠: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는 신경 안 쓰면 좋겠다.
-엄마: 짜증을 안 냈으면 좋겠다.
-첫째: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정하면 좋겠다. 언어사용을 신중히 하기 바란다.
-둘째: 자기 할 일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챙기면 좋겠다.
위 답변을 들은 식구들은 이외의 반응을 보였다. 구성원의 솔직한 마음을 들으면 당황스럽고 기분이 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덤덤히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아빠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식구들이 원한다면 노력해 보겠다고 했고, 첫째는 밤 10시 30분이 되면 스마트폰을 제출하는 것에 동의하고, 언어 사용에 조심하겠다고 약속했다. 둘째는 할 일을 스스로 챙기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엄마인 나만 '짜증을 안 냈으면 좋겠다'는 식구들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식구들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일로, 집안일로 바빠. 아빠는 회식, 저녁 약속으로 밤까지 집에 없는 날이 많고.. 나도 내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도무지 시간이 안나. 피곤한데 할 일이 남아 있으면 기분이 나빠져.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으니까. 짜증 안 내겠다고 약속하기 전에 부탁이 있어. 이제 애들도 컸으니 집안일을 나눴으면 해.'
남편이 순순히 술자리를 주 2회 정도로 줄이고 저녁 설거지를 담당하겠다고 나섰다.
첫째는 주말 저녁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원했고, 둘째는 빨래 개기와 신발정리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가족회의하기까지 혼자서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식구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정말 이렇게 아무 일 없이 가족회의가 흘러간다고?
그랬다. 평소 우리 집 분위기와 달리 고성 없이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마음 편한 집에 대한 목마름은 모두에게도 간절했던 것은 아닐까?
식구들은 매달 가족회의를 여는 것에 찬성했다. 회의 후 가족 회식자리도 갖기로 했다. 둘째가 신나서 탁상달력의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친다. 한 달 후 다시 열게 될 두 번째 가족회의가 기대된다. 각자 어떤 한 달을 보냈을지, 어떤 이야기를 펼쳐놓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