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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Jul 14. 2024

두 번째이자 마지막 출산/육아휴직


2023년 12월, 계획에 없던 둘째가 생겼다.


연말 마무리 다이어트를 위해서 밤 달리기를 하던 중, 너무 이질적인 피로감이 느껴졌다. 망년회 과식으로 인한 무거움과는 다른 피로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촉이 왔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석에 처박아뒀던 임신키트를 사용했다. 선명하게 표시되는 두 줄. 가슴이 쿵 내려앉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대로 변기에 주저앉았다. 내일모레 만 36세, 집과 회사를 넘나들면서 첫 째 아들을 간신히 30개월 사람 모양으로 키워낸 초보 워킹맘.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나 싶었는데 다시 임신이라니? 신생아라니? 내년엔 해외여행도 가고 대학원도 알아봐야겠다던 어제까지의 부질없던 계획이 내 영혼과 함께 몸을 빠져나갔다.


남편에게 임신키트 사진과 함께 카카오톡을 보냈다. 이 현실이 믿기지 않고 무서운 나와 달리 남편은 왠지 신나 보였다. 하긴 우리 둘 다 은근히 둘째를 바랐지만 도저히 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차마 임신계획도 철저한 피임도 못했었다. 그렇지만 남편 너는 너무 해맑은 것 같다? 내 반쪽의 철없는 기쁨을 보면서 나는 짜증과 묘한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어차피 낳을 거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얼른 수습이나 하자. 첫 째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는 깨달았다. 부모의 삶을 선택한 이상, 그 무엇 하나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는 것을.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이뤄가는 성취감 대신 예상치 못한 돌발 이벤트의 깜짝 스릴과 해결 과정의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나와 남편 모두 1년 휴직하기로 했다.


나는 출산/육아휴직을 합쳐서 1년, 남편은 육아휴직만 1년. 출산 예정일에 맞춰서 올해 7월부터 내년 6월 말까지, 여름/가을/겨울/봄 사계절을 네 식구끼리 오롯이 보내기로 했다. 생계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늘어난 부모급여(월 100만 원)와 6+6 육아휴직 급여 인상 그리고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을 합치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고 느슨하게 계획했다. 대신, 우리 인생에 다시없을 동반 휴직 1년의 장밋빛 미래만 생각했다. 이미 겪어본 바와 같이 신생아 육아는 카오스다. 심지어 이번에는 미운 네 살의 첫 째 육아까지 함께 해야 한다. 혼자 하면 생지옥이겠지만 둘이 하면 훨씬 나을 것이다. 100일만 잘 버텨내고, 그 후엔 휴먼 드라마처럼 가족끼리 하하호호 웃으면서 공원을 거니는 아름다운 장면도 연출해 보자고 얘기했다.


2024년 6월, 설레는 마음으로 1년 육아휴직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남편과 합의 하에 우리 가족계획은 4명으로 확정했다. 제왕절개 예정이므로 개복한 김에 난관 절제 피임수술도 함께 예약했다. 즉, 이번이 내 마지막 임신이며, 앞으로의 1년이 내 인생 마지막 출산/육아휴직이 될 것이다. 은퇴하기 전 30대의 젊음을 불태울 수 있는 마지막 휴가를 고대하면서 '꼭 해내겠다'는 의지보다는 '이건 한 번 해보고 싶다'는 희망만 담아서 1년 육아휴직 버킷리스트를 노트에 적었다.


1. 글쓰기 수업 듣기 - 한겨레 오프라인 아카데미 수강
2. 브런치북 1개 만들기 - 주제는 모르겠음.
3. 등산 1주 1회 - 동네 뒷산, 힘들면 둘레길 걷기라도..
4. 달리기 1주 2~3회 - 7호선 출근길 창 밖, 아침에 뚝섬유원지를 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5. 피아노 1곡 악보 없이 칠 수 있기 - 집 앞 피아노학원 광고에 홀렸다.
6. 직무 관련 프로그램 수료 - 복직 준비도 해야 하니까.. 학술마케팅 쪽으로 알아봐야지.
7. 독서 모임 참여 -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8. 나 혼자 해외여행 - 남편, 4살 & 1살 아이 혼자서 2박 3일 정도는 볼 수 있지?
9. 피부과 시술받기 - 대학원의 꿈을 물 건너갔고.. 모아놓은 돈, 나도 피부과에 써보자.
10. 장기 재테크 포트폴리오 구축 - 유산은 못 물려줄지언정 애들한테 손은 벌리지 말자, 노후 준비


애 없는 20~30대 시절에도 다 못 지켰을 계획이지만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마구 적었다. 펜으로 적기만 해도 꼭 이뤄질 것처럼 고무됐다. 경산모(경력산모)인 만큼 신생아를 키우면서 저것까지 다 해낼 수 없다는 현실을 알기에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는 무거운 의무감이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나날이 순수하게 설레고 기대된다.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내는 만큼 기쁘고 보람찬 마음으로 브런치에 후기를 올려야겠다. 완벽하게 수행한 성공담 10개보다는, 어정쩡한 성공 혹은 실패더라도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의 기쁨과 슬픔이 담겨있는 경험담이면 좋겠다. 한 가지 계획을 이뤄가는 여러 개의 경험담이 모여서 내년 이맘때에는 브런치북으로 엮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없을 젊은 날의 초상으로 남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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