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학번의 공간 대여 N잡러 도전기
[N잡러는 여러 수를 의미하는 N에 직업을 뜻하는 Job과 사람을 일컫는 ~er을 붙인 합성어로 한 명이 여러 개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MZ 세대들은 N잡러를 꿈꾼다. N잡러 생활이 안정되면 회사는 때려치우는 것이 목표다. 그런 그들에게 공간 대여가 각광받고 있다. 적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 일정한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루 30분 일하고 월 300은 번다더라…”류의 얘기들이 많다. (이건 누가 코인 해서 떼돈 벌었다 와 같은 얘기다. 돈을 번 사람이 있겠지만,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데 정작 N잡러가 되어야 하는 것은 MZ 세대보다도 본업을 그만둘(자의든 타의든) 시간이 멀지 않은 4050이 아닐까? 88 꿈나무로 대학에 들어가 땔나무라는 소리를 듣다 이제 은퇴를 생각할 나이가 된 2022년에 어쩌다 공간 대여를 부업으로 시작한 이야기]
내가 만들 공간의 콘셉트와 네이밍이다.
(사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뭘 해도 '좋은' 으로 바뀌었지만, 오픈 과정을 적는 글인만큼 그대로 쓴다)
뭘 해도 된다는 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는 거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특화된 게 없다는 얘기다. 사실 난 클라이언트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콘셉트를 설명할 때 이렇게 ‘올마이티(almighty)’를 얘기하면 대체로 크게 반발하는 스타일이(였)다. 뾰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흥분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응접실은?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자세인가 ㅎㅎㅎ
전에는 마케팅을 시작할 때는 가장 먼저 타겟을 정의하곤 했다. 몇 살 먹은 어느 정도 수입을 가진 여성 또는 남성이 쓰는 제품이다. 용도 역시 이렇게 사용하라고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그걸 커뮤니케이션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어디 가서 타겟이 몇 살인가요?”라고 물으면 마알못(마케팅을 알지 못하는)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제품의 용도도 소비자가 정의하고, 그들의 아이디어가 다시 새로운 상품으로 탄생하는 시대다.
다시 응접실의 콘셉트와 타겟으로 돌아와서 ‘뭘 해도 되는 렌탈 플레이스’라고 했지만, 어떤 사람들이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한 가이드는 던져주어야 한다. 그걸 더 디벨롭해서 니즈에 맞게 활용하는 건 이용자들의 몫이겠지만. 그리고 아무리 내가 쓰고 남는 시간에 대여를 해서 월세나 벌어보겠다고 시작했지만,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세도 벌기 힘든 자영업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월세나…’라는 게 사실 얼마나 자만적이고 위험한 발상인가.
우선은 “응접실은요 이런 분들이 이런 걸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를 이야기할 때 어떤 예를 들어야 할까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렌탈 플레이스를 만들기로 한 미사는 신도시다. 젊은 신혼부부도 많고, 어린아이들도 유난히 많은 동네다.
미사에서 공간 대여를 할까 한다고 말하면, 이 지역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비슷한 얘기를 한다.
“아이들 생일파티, 소규모 돌잔치, 이런 걸 하면 딱이겠다.”
“아이들 등원/등교시키고 엄마들 모임 하면 좋겠네~”
“홍보는 맘카페에서 하면 입소문도 금방 날 거야.”
젊은 친구들은
“파티룸은 브라이덜 샤워하러 가봤어요.”
“요즘은 드레스도 빌려주고, 꽃장식도 다 해주니까 인기가 많더라고요.”
다들 전문가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아이들과 관련된 건 이해도가 제로다.
그리고 솔직히 맘카페는 좀 무섭다.
이쯤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자.
내가 임대한 공간은 고작 11평 남짓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본 돌잔치는 10년도 넘은 것 같다.
나는 결혼을 안 했고 아이도 없고, 맘들의 세상은 일도 모른다.
나는 브라이덜 샤워를 한 번도 한적도 심지어 본 적도 없다.
나는 본업이 따로 있어 시간이 들어가는 추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다
나는 러블리한 공간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이전글 ‘4.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확실해졌다.’ 참조)
단점과 문제점 투성이다. 이 정도면 접어야 되는 것 아닐까?
이번에는 공간대여 플랫폼 스페이스 클라우드로 가봤다.
검색 탭을 누르면 다음과 같은 인기키워드가 뜬다.
#루프탑
#필라테스
#요가
#쿠킹
#한옥
#브라이덜샤워
#발레
#바비큐
#자연광
#영화
물리적으로 안 되는 것들을 지우고 나니
#쿠킹
#브라이덜샤워
#자연광
#영화
가 남는다.
쿠킹은 아마 공유주방을 빌리고 싶은 사람들의 검색일 거고, 자연광은 렌탈 스튜디오 관련 검색일 거다. 응접실도 둘 다 가능은 하다. 영화를 볼 수 있는 프로젝터는 사면되고, 역시 수익을 생각하면 #브라이덜샤워 인가?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에 ‘파티룸’을 검색해 보면 90% 이상이 브라이덜 샤워용이다.
그렇다! 이게 팔린다는 거다.
사람들이 돈이 된다고 말하는 것들 중 키즈, 돌잔치는 절대 못할 거라 바로 포기했지만...
브라이덜 샤워는 그래도, 조금은, 노력하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없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어디로 갈까 헷갈릴 때마다 맨 처음 적어둔 ‘목적’을 다시 찾아 읽는다고 했었다.
거기에 답이 있다고.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을 만들어 내가 사용하고 남는 시간에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마이웨이다!
내 취향대로 간다!
내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내가 스트레스 덜 받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이번에는 앞의 단점들을 뒤집어 긍정적으로 해석해 봤다.
내가 임대한 공간은 작지만 뷰가 좋다. 아늑하다.
나는 호텔이나 에어비앤비에 대한 경험이 많다.
나는 모임이나 회의를 위해 공간을 많이 빌려봐서 니즈를 잘 안다.
나는 직업상 크고 작은 행사를 많이 해봤다.
나는 본업이 따로 있어 수익에 크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내 취향이 확실하고 취향을 담은 물건(소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돌고 돌아 원점으로 왔다.
난 그냥 내가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었다.
브샤나 돌잔치에는 안 어울리는.
스페이스 클라우드에 공간을 등록하면서 처음으로 공간에 대한 설명을 적게 되었다.
나는 아래와 같이 썼다.
“응접실(應接室)의 사전적 정의는 ‘손님을 맞아들여 접대하기 위하여 꾸며 놓은 방’입니다.
무엇을 할지 정하는 것은 이제 응접실의 주인이 될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곳 응접실에서는 뭘 해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손님을 여럿 맞아도 되지만 혼자, 혹은 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악 문의를 하는 분께 나는 솔직하게 설명하는 편이다.
이 공간은 브샤 딱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라고.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만한 게 별로 없다고.
그런데 오픈하고 1~2주쯤 지났을까 주말에 2팀이나 브라이덜 샤워를 하러 왔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오는 엄마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여럿 온 조동모임도 열렸었다.
(조리원 동기 모임을 이렇게 줄여 부른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역시 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일 뿐 그걸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그들 맘이다.
‘뭘해도 되는 렌탈 플레이스 응접실’ 컨셉이 점점 더 맘에 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