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번 먹어요'의 의미
엊그제 친구들과 점심 먹던 중 우연히 최근 내 짝사랑 썰이 화두에 올랐다. 평소 소심하고 찐따 기질이 다분한 내 입장에서 까였다고 생각한 에피소드를 두고 내가 까인 건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몇 개월 전부터 호감을 품게 된 회사 동료가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차마 회사라는 이유로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더라도 호감을 표시했을 때 상대방의 회사생활이 자칫 곤란해질까 봐.
어쩌면 나보다 더 소심한 사람이라 그 뒤로 나를 껄끄러워할까 봐.
용기 내 다가가지 못하는 나의 소심함을 상대방을 향한 배려심이란 단어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티 한번 못 내고 속앓이를 하던 중, 평소 '로맨틱 불도저'라 불리던 친구 한 명이 그렇게 속앓이 할바에 딱 한 번이라도 티 내보라고 했다.
좋아하는 티는 어떻게 내는 거냐고 되묻는 내 말에 친구는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간단하지. '같이 밥 먹을래요?' 이게 대시지 뭐야."
'같이 밥 먹을래요?'
그렇게 나는 위 문장을 프로젝트 마지막 날 꼭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프로젝트 마지막 날.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 문장을 내뱉기까지 식은땀 세 바가지는 흘렸다가, 수십 번 손을 쥐락펴락했다가, 내적 심호흡을 수만 번 했다가, 같은 문장을 입 안에서 수백 번은 되뇌었을 것이다.
그리고 용기 내서, 그러나 긴장한 티가 나지 않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러나 어쩌면 꽤나 부자연스럽게 툭 던졌다.
"00씨! 오늘 일 끝나고 같이 밥 먹을래요?"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다소 난감해하며 답했다.
"어쩌죠? 오늘 저 회사에 복귀할 일 있는데.. 다음에 날 잡고 먹는 게 어때요?"
나는 이 답변을 듣고 완곡한 거절이구나 싶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밥 먹자는 문장을 내뱉는 연습은 숱하게 했지만, 거절당했을 때 실망한 기색을 완벽하게 숨기는 연습은 못했던 게 통탄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일을 마무리짓고 퇴근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난생처음 대시라는 걸 해본 나는 거절이라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앞으로 회사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날 밤 머리를 싸맸더랬다.
엊그제 이 에피소드를 들은 친구 한 명은 그건 까인 게 아니라고 말했고, 나머지 한 명은 상대방의 완곡한 거절이 맞다고 했다.
"그냥 정말 일이 있어서 회사 복귀한다는데 대체 어디서 까였다는 거야?"
"근데 그 사람도 마음이 있었다면 일을 미루고서라도 먹었겠지. 혹은 그다음 밥 약속을 바로 잡았다거나."
"그런가? 근데 같이 프로젝트했던 사람한테 고생했다고 밥 먹자고 하는 거 너무나 흔한 일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회사에서 남자, 여자 단둘이 밥 먹자고 한건 엄청난 의미지!"
"근데 프로젝트를 둘이 했는데 어떡해."
"진짜 눈치 없는 사람 아니고서야 호감 표시구나 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 도끼병이지."
어쩌다 보니 친구 두 명이서 내가 던진 '같이 밥 먹어요'가 대시냐 아니냐로 토론 아닌 토론을 펼치고 있었고, 결국 그날 우린 답은 내리지 못했다.
열띤 토론 과정 속에서, 까였다고 울적해하던 내가 잠시 희망을 경험했다가, 또 거절이 맞다는 다른 친구의 말에 다시 기분이 침전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몇 시간 동안 뫼비우스 띠로 이루어진 롤러코스터를 타다 온 기분이었다.
그러다 오늘 회사에서 친한 동료를 오랜만에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망설임 없이 "00씨~ 우리 조만간 밥 한번 먹어요!"라고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다 호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나 쉬운 말이었구나 싶어 흠칫했다. 단지 호감 있다는 이유로 같은 문장이 입 안에서 뱉어내기 힘들 만큼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던 것이다.
오늘도 나란 찐따는 '밥 먹을래요?'라는 문장의 의미를 되뇌어 본다.
어떻게 보면 대시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나 지극히 예의 치레 수준의 문장.
그렇다면 이 문장이 가진 대시냐 아니냐의 맥락은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내뱉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둘 사이의 지난 시간 동안의 서사가 결정해주는 걸까?
대시란 뭘까.
나같이 소심하고 찐따 같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어렵다.
올해도 연애하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