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2023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한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 단조로운 어휘 뒤로 처음 봤던 순간의 쾌락 같은 감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 좋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그를 좋아한다고 외쳐도 이제 그 외침으로 그의 대단함에 편승해 나를 올려세울 수 없다. 이제 이 외침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내가 외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수의 환호 속에 지저분한 나의 외침은 죽는다. 묻혀 흐릿해진다.
그래도 결국 적지 않고는 못 넘어가겠다 싶다.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다 part 1을 처음 보고 느낀 그때의 감정을 먼저 적어본다. 나는 김은숙 작가의 로맨스를 좋아해 왔기 때문에 이번 작품이 ‘학폭 복수물’이라고 해서 보기를 많이 망설였다. 공개하고도 한참 뒤에 봤는데, 역시 뭐든 정면으로 마주하고 봐야지. 지레 겁먹고 또 뭔가 놓칠 뻔했다.
장르물에 로맨스가 들어간다고 싫어하는 사람들 곁에서 늘 ‘인생은 사랑이다’ 외치는 사람으로서 주여정의 존재는 드라마를 더 황홀하게 만드는 데 대단한 지분을 차지했다고 말하고 싶다. 주여정 캐릭터는 단 두 장면으로 손쉽게 정의된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자기는 물속처럼 고요하면서 나는 폭풍 속에 세워두는 사람.” 고요한 동은에게 여정은 자신의 단추를 떼 달아준다. '자신의 단추를 뜯어 상대의 단추를 달아주는 사람'. 김은숙 작가의 캐릭터 설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폭풍을 견디며 옆에 있는 사람. 어릴 때부터 김은숙 작가의 작품을 봐 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게 작가의 인생관이든 취향이든 글버릇이든 인생과 목숨, 마음을 바쳐 옆에서 버텨주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데 보는 사람은 어떻게 황홀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인생은 외롭다. 그런 사람하나, 딱 하나만 옆에 있게 해달라고 매일 빈다. 허구라도 딱 만들어서 보여주는데 어떻게 기대지 않을 수 있을까.
슬프게, 아름답게. 김은숙 작가의 작품은 의도한 것인지 늘 너무 아름답다. 지옥 같은 현실에도 자연은 얄밉도록 눈부시게 아름답다. 눈치 없이, 역설적으로. 그러니 신은 없나. 그런가 싶으면 반드시 좋은 사람들이 나온다. 반드시 나와 편들게 한다. 그렇게 세상은 온전히 아름다워진다. 복수도 반드시 옳은 사람만 할 수 있다.
1화에서 동은은 (상상이지만) 연진에게 스테이플러를 들이대며 말한다. 힘 닿는 데까지 널 죽여보겠다고, 나는 거의 도착했다고. 동은의 광기어린 모습에도 나는 이 장면에서 다른 복수물을 보며 느꼈던 짜릿한 복수의 쾌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고 느꼈던 건, 복수를 행하는 여자 주인공을 향한 동경이 아니라 왜 거기까지 가야 했을까 하는,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걸어야 했을 동은을 향한 아릿함이었다. 보니 앤 클라이드나 조커와 할리퀸을 보면서 느끼던 악에 대한 동경, 그에 따른 자유로움이 아니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반드시 옳은 사람이고 끝까지 이성적이다. 작가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복수는 이런 것이다.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은 사람에게만 반드시 주어지는 벌 같은 것. 피해자는 반드시 행복해지도록 옆에 누군가를 꼭 붙여주어 결국 행복해지게 만드는 결말.
part 2의 초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9화에서 동은은 자신의 집에 들어왔던 연진을 찾아와 말한다. “그냥 비밀번호 물어보지, 도어락 비싼데 연진아.” 그리곤 헛소리를 하는 연진에게 말한다. ”입을 찢어버려야 하나, 문 따라고 돈 준 손모가지를 부러뜨려야 하나." 이런 모습은 이전화들에서는 볼 수 없던 동은의 모습이다. 욕하나 없이도 섬뜩하게 들리는 대사. 전에도 그렇지만 특히나 이 장면에서 동은은 연진을 향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인다.
드라마 내내 동은은 연진의 이름을 부른다. 말이 끝날 때마다 꼭꼭 붙여서 부른다. '연진아' 이름이란 단순한 부름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학교폭력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가해자, 두려운 존재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동은은 여느 때보다 더, 한점의 두려움 없이 연진의 이름을 부른다. 동은이 연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름을 부르는 건 더 이상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너는 내가 꼭 망가뜨릴 거야. 라는 다짐. 그 마음으로 동은은 연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왔던 게 아닐까.
이게 이름이 가진 힘이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어떤 이에겐 다짐이고, 용기다.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증오가 치밀어 하루를 망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작품은 모두가 스스로 자신이 만나 온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이름으로 남아있는지 고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