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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Jan 18. 2024

아주 특별한 집에 관한 이야기

<딜쿠샤의 추억> (김세미 이미진 글, 전현선 그림)

딜쿠샤는 1923년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집 이름이다. 백 년이 넘은 이 집이 지금은 문화재가 되어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책 <딜쿠샤의 추억>은 소개한다.

글쓴이 김세미와 이미진은 다큐멘터리 작가와 프로듀서로 2005년에  딜쿠샤를 만나 그때부터 딜쿠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그림책 <딜쿠샤의 추억>은 그들이 전해주는 딜쿠샤의 이야기다.


1917년 미국인 앨버트와 영국인 메리 부부는 인왕산 성벽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다 만난 오래된 은행나무를 보고 마음을 빼앗긴 메리와 앨버트는 은행나무 옆에 집을 짓기 시작했고 그 집에 메리는 딜쿠샤란 이름을 붙였다.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연극배우이자 화가인 메리는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 한국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사업가이자 기자인 앨버트는 일제 치하우리나라의 독립에 관심이 많았다. 앨버트는 아들 브루스가 태어났을 즈음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에 숨긴 3.1 독립 선언서를 동생 빌의 신발 뒤축에 숨겨 한국을 빠져나가게 했다. 덕분에 전 세계 신문에 한국의 3.1 독립 만세 운동 기사가 실리면서 앨버트가 내보낸 3.1 독립 선언서도 함께 실릴 수 있었다.

1940년, 스물한 살이 된 브루스는 군에 입대하게 되어 딜쿠샤를 떠났고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메리는 가택 연금을 당한다. 집 안에 갇혀 포로가 된 메리는 식량이 떨어져 개 사료로 죽을 쑤어 먹으며 버티고 한국인 이웃들은 그런 메리를 위해 문 밖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며 도와준다.


앨버트는 6개월 뒤 석방되지만 그들 부부는 일본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딜쿠샤를 남겨 두고 한국에서 쫓겨난다. 딜쿠샤에 있던 값나가는 물건은 일본인 가져가고 한국은 1945년 해방이 되었는데 주인 없는 딜쿠샤는 돌볼 사람이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는 헤집고 들쑤셔진다.


1948년, 메리가 혼자 돌아왔다. 미국에서 살던 그들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고대하며 살다가 앨버트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한국에 묻힐 것을 유언으로 남겨 메리는 앨버트를 한국 땅에 묻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폭탄이 떨어지고 거리는 잿더미가 되고 머물 곳 없는 피난민들이 딜쿠샤로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살아남은 딜쿠샤는 폐허가 된 도시가 빠르게 복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67년 딜쿠샤 밑으로 건설된 사직터널 덕분에 딜쿠샤는 개발자들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제 기와집과 초가집은 사라지고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산 쪽으로 몰려와 살았는데 딜쿠샤는 집 없는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열다섯이 넘는 가족들이 들어와 살면서 딜쿠샤는 쪼개지고 나눠져 옛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점점 낡고 빛바래갔다.


2006년, 스물한 살에 떠났던 루스가 66년 만에 딜쿠샤로 돌아왔다. 메리는 세상을 떠났고 브루스는 아내와 딸과 함께 딜쿠샤의 낡은 모습을 바라보며 반갑고 안타까워했다. 브루스가 다녀간 뒤에도 태풍과 화재로 딜쿠샤는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잘 버티며 살아남았다.

2016년, 브루스의 딸 제니퍼가 딜쿠샤를 찾아와 은행나무 밑동에 고인이 된 브루스의 재를 뿌렸다. 그리고 그해 서울시와 기획재정부, 문화재청은 딜쿠샤를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로 했고 2017년 문화재청은 딜쿠샤를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공식 등록했다.


그림책으로 만들어진 <딜쿠샤의 추억>은 오래된 집이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와 관련된 우리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쓰였다.


사라질 수 있는 위기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지만 딜쿠샤는 백 년이라는 시간을 버텼다. 일제 강점기에 서양식으로 지어진 오래된 2층 벽돌집을 보면서 작가들은 그 속에 담긴 우리의 아픈 역사와 외국인들의 선한 마음을 보았을 것이다. 강자 편에 서지 않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 편에 서서 우리를 도우려다 영어 생활까지 한 그들의 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앨버트와 메리의 마음이 그들이 살던 집을 통해 보존되고 기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작가들에게 책을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찍게 하지 않았을까 각한다. 가치 있는 일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낳아서 순환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는 것 같다.


결국 딜쿠샤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건축물의 역사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정의의 편에 서는 마음, 핍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마음 때문이라는 생각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폐허,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 대열에 오르게 된 지금 우리에게 <딜쿠샤의 추억>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많이 가질수록 가지지 못한 자를 돌볼 줄 아는 마음이, 강할수록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격차를 줄이고 나누려는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한 때인 것 같아서다.


지금 딜쿠샤는 2021년 3월에 개관되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어느 봄볕 좋은 날, 딜쿠샤 옆에 오래된 친구처럼 여전히 서 있을 은행나무의 은행잎이 새끼손톱만큼 나올 즈음, 혹은 은행나무가 널찍하고 푸르른 은행잎으로 덮여 주변에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갈 즈음, 혹은 온통 노오랗게 은행잎이 주변을 물들일 즈음,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또 지하철을 타고 3호선 독립문 역에 내려 500여 미터쯤 걸어가 딜쿠샤를 만나고 싶다. 오래된 친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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