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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caa Apr 19. 2022

다산의 공감 연습2(맹자6)

6장 불혹과 부동심/아사십부동심我四十不動心

 《맹자》의 두 번째 <공손추公孫丑> 편은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양혜왕> 편은 제후들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공손추>에서는 제자들과의 대화가 중심이 되어, 더욱 《논어》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물론 《논어》의 대화에 비해서 훨씬 긴 대화가 오고 가는데, <공손추> 상편 2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이 제나라 재상의 지위에 올라 도道를 실천하실 수 있게 된다면 비록 패도霸道가 되었거나 왕도王道가 되었거나 달리 여기실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시다면 마음이 흔들리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시겠습니까?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霸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공손추> 상편 2장     


 앞서 <공손추> 상편 1장에서는 “선생님이 제나라 정치 요로要路에 서 계신다면 관중管仲이나 안자晏子의 공적을 기대해도 좋을까요夫子當路於齊 管仲晏子之功 可復許乎?”라는 공손추의 질문으로 시작했다. 관중과 안자는 제나라의 대표적인 재상이다. 공손추 역시 제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나라 재상들을 언급하면서, 맹자도 그들과 같은 정치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지 물어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물론 부정적이었다. 춘추시대의 군주나 재상들은 모두 힘으로 천하를 평정한 인물들이었다. 공자의 덕치주의를 계승한 맹자는 힘이 아닌 덕德으로 세상의 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랬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관중과 비교를 거부하였다.

 <공손추> 상편 2장에서 공손추는 질문의 형식을 바꾼다. 맹자는 힘으로 하는 패도霸道정치와 덕으로 하는 왕도王道정치를 구분했는데, 이 두 가지 정치를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옮기면, 공감정치와 공포정치라 할 수 있다. 왕도정치는 덕으로 하는 정치인데, 맹자가 양혜왕이나 제선왕에게 주장했던 ‘여민동락’의 정치, 곧 공감의 정치인 것이다. 반면에 패도정치는 힘으로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자국의 백성들까지 위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 곧 공포정치이다. 정약용도 인간의 감정 중에서 ‘두려움’을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고 보았는데, 공포정치는 인간의 두려움을 극대화한 정치이다. 이와는 반대로 공감의 능력을 극대화한 정치가 공감정치 즉, 가장 이상적인 정치이다. 그러나 공감정치만 가지고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분열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가치가 또한 필요하다.

 지금 공손추는 맹자가 재상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면 공감정치, 공포정치라는 이분법을 잠시 벗어나 패도정치를 할 수 있겠냐는 의도로 물어보고 있다. 공손추는 패도이든 왕도이든 도道를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다면 일단은 맹자가 수긍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는 사회정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이상만 가지고는 어렵다. 집행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재상이 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맹자의 대답은 공손추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니다. 내 나이 40이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否. 我四十不動心.     


 《논어》에서 공자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즉, “마흔 살이 되어서 미혹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불혹不惑’과 맹자의 ‘부동심不動心’은 표현의 차이이지 내용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경향은 주자도 불혹과 부동심을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정약용은 불혹과 부동심을 다른 것으로 보았다. 핵심내용만 말하자면, 공자의 불혹은 지식[知]과 관련된 것이고, 맹자의 부동심은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情]과 관련되었다고 정약용은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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