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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in Winter Sep 28. 2022

죽었다 태어나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게 이런 기분 일까?


그날 아침은 눈을 떴는데 앞에 보이는 광경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앞에는 연두색 커튼이 벽처럼 쳐져있었고, 천정 가운데에 라디오 크기 만한 하얀 철제 박스가 매달려있었다. 정사각형의 하얀 패널로 마감된 천정은 답답했고, 커튼 너머로 시린 빛의 긴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기절을 했었는지, 깊은 잠을 잤는지, 이것이 꿈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불안하고 황당한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조차 너무도 고차원적인 일이었다. 나는 식물처럼 누워 앞에 펼쳐진 세상에서 제일 생기 없는 연두색 커튼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 거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계속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커튼이 걷히고, 그저 평범한 아침처럼 ‘Huomenta!(후오멘따: 핀란드어로 좋은 아침)하며 미소 짓는 따뚜의 얼굴이 보이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릿속에 쿵! 하고 무거운 생각이 떨어졌다.


  ‘맞다… 내가 아기를 낳았다!'


며칠 전 출산을 했다는 기억이 번뜩 든 뒤로, 깜깜하기만 했던 기억의 방들에 불이 줄 지어 파다닷 들어왔다. 

‘아... 여기는 병원이다!’

‘예정일 보다 40일이나 일찍 아기가 태어나는 바람에 가랑이 너머로 스치듯 아기 얼굴을 봤었지…그리고 곧 회복실로 옮겨져 하룻밤을 지내면서 수혈을 받았다… 임신할 때부터 이상 증상이 있었던 낮은 혈소판 수치가 문제가 있다며 간호사들이 팔 여기저기에 바늘을 꽂아서 피를 수시로 뽑아갔는데… 게다가 소변줄을 꽂아야 한다며 미숙한 실습생이 시도하려다 너무 아파서 내가 꽥!!! 소리를 질렀지…아, 누운 상태로는 도저히 큰일을 볼 수 없어 혼자 화장실에 갔다가 기절도 했는데… 간호사가 “Apua(아뿌아:도와주세요)!”라고 한 소리에 정신이 들어 바닥을 봤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피를 목격한 건 라플란드에서 총에 맞은 야생 엘크를 해체하는 걸 본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회복실에서 정신없는 하룻밤을 더 보내고 부산스러운 소리에 잠을 깼는데, 간호사가 다급히 지금 당장 ICU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게 뭐지? 좀 더 쾌적한 개인실로 간다는 건가? 곧 백 미터를 10초 내에 달릴 것 같은 청년 세 명이 와서 내 침대를 잡고 산부인과 건물의 지하에 숨겨진 통로로 내달려서 옆 건물의 병실로 옮겨졌다. 아…ICU는 Intensive Care Units의 약자 중환자실이구나… 내 몸이 뭔가 크게 잘 못 되었나? 삼일 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따뜻한 밥 한 끼도 못 먹어서 조금 어지럽고 피곤한 것뿐이었는데… 이게 중환자실까지 올 일이었나?!’


이 모든 기억이 단 몇 초안에 떠올랐다. 중환자실에서 첫날은 여러 명의 의료진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간호사가 푹 자라며 여러 개의 알약을 줬다. 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 베개에 머리를 눕히자마자 눈을 잠깐 감았다 떴는데 아침이 되었다.


나의 뇌는 나를 참으로 측은히 여긴 것일까? 중환자실에서의 첫날밤, 약에 의존해서 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 뇌는 삶에서 가장 아프고, 고되고, 무섭고, 외로웠던 3일의 기억을 잠깐 이었지만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뇌의 모든 프로그램이 리셋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아침에 아무 생각도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순간이 살아내기 위한 자가 치료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머리는 모든 힘들었던 기억을 지워 나를 살려내려 애써 보았지만,   몸에 남은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아기가 태어났다는 기쁨과 동시에, 아기의 온기 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슬픔은 온몸의 세포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새겨져 이대로 뇌사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있다 커튼이 걷히고 아빠가 된 따뚜가 그날 아침에 찍은 아기의 사진을 들고 병실에 왔다. 사진 속 아기도 나처럼 중환자실 병실 침대에 누워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에 몸을 연결하고, 코에 호스를 달고, 몸에 맞지 않는 큰 병원 옷을 입고,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빛나는 까만 눈동자는 ‘엄마 어디 있어? 엄마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기의 사진을 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감정이 격해지면 혈압이 올라가 기계에서 ‘빕빕빕’ 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고음으로 들렸다. 나는 살기 위해 눈물을 훔치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감정을 최대한 뱉어 냈다. 그토록 궁금해하던 아기의 사진을 가방 깊숙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넣고, 그 가방을 또 병실 구석에 있는 서랍 안에 꼭꼭 감추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의 백지상태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루 종일 바라봐야 하는 눈앞의 연두색 커튼은 차라리 생기 없는 편이 나았다. 이 출렁이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잠잠하게 해주는 색이었다. 


그날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났다. 이전의 나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엄마로 태어났다. 빨리 병원을 나가서 아기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새롭게 얻은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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