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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in Winter Oct 09. 2023

사과나무

첫 번째 핀란드산 공짜 행복

처음 내 주머니로 들어온 공짜 행복은 사과나무였다.

한국의 시골집 마당에서 가을이면 감나무를 집집마다 볼 수 있다면, 헬싱키에서는 사과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언제나 사과였는데, 한국에서는 살면서 사과나무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위에서 자란 나는 사과나무가 아무렇지 않게 집 근처에 서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과나무를 발견한 건 헬싱키로 이사 오고 한 달이 더 지나서였다. 사과나무에 까막눈이었던 내 눈을 뜨이게 해 준 건 우연히 참가한 ‘자전거 채집 워크숍’에서였다. 두세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헬싱키 시내의 공원과 길가, 공공건물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과일과 견과류, 풀을 채집하는 워크숍이었다.


자전거 채집 워크숍에서 얻은 수확


워크숍에서 특히, 참가자들과 함께 사과를 채집하는 과정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과정은 간단했다. 사과나무 아래서 여러 명이 커다란 천을 사방에서 잡고 기다리면, 힘이 제일  사람이 사과나무 기둥을 있는 힘껏 흔드는 것이었다. 단숨에 후두두둑 모두가 먹고 남을 정도의 사과가 떨어졌다.

함께 사과를 채집하는 모습


이후로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나무와 풀이  이상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저건 어떤 과일이 열릴까?’, ‘ 모양과 향기를 봐서는 여름에 베리가 열리겠다…’, ‘내년에 과일이 열릴 시기에 다시 와보자!’. 유독  달콤하고 아삭한 사과가 열리는 나무가 있는 곳은 구글지도에 표시까지  두며 내가 살던 동네를 열심히 탐색했다.


마침, 처음 수강한 학교 수업에서 사과나무와 더욱 친해질 계기가 생겼다. 수업에서는 ‘에너지’라는 주제로 모든 예술-디자인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날 자전거 채집 워크숍에서 사과를 다 함께 채집했던 경험은 나를 집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게 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동지애를 느끼게 했으며, 내 주변 환경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한 큰 힘의 원천이었다. 사과나무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에 더 많은 사과나무를 발견해 보기로 하고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산책을 했다. 가을볕을 벗 삼아서 평소보다 천천히, 낯선 길로 우회해서 걸으면서 눈을 크게 뜨고, 코를 킁킁 거리며 사과나무 사냥에 나섰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비장하게 나섰지만 사과나무를 찾는 것은 정말 쉬웠다.


사과나무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심지어 사과나무 아래에는 땅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사과가 한가득 떨어져 낙엽처럼 뒹굴고 있었다! 매번 산책할 때 공기 중에 떠다니던 은은하게 달콤한 향기는 사과나무에서 나는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과나무의 생김새가 익숙해지고 나서는 두세 걸음 옮길 때마다 다른 나무가 보였고, 나중에는 눈을 감고 걸으면서 사과의 달콤한 향기로 사과나무가 어디쯤에 있다는 걸 맞추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한참을 사과나무 사냥에 열중하다가 파스텔톤의 오래된 나무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화 같은 동네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집이 있는 방향을 찾아 다세대 주택이 함께 사용하는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정원에는 푸른 사과를 가득 매달은 큰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그 앞에는 날이 좋을 때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기 적당한 크기의 낡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고, 그 테이블 위에는 곱고 푸른 사과들이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가을비를 맞아 반짝거리기까지 한 푸른빛의 사과 테이블은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이라, 이것을 만든 사람은 예술가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길을 잃고 배회하다 발견한 사과나무 정원


한참을 테이블 앞에 서서 혼자 감탄하고 있는 사이 할아버지 한 분이 집에서 빗자루를 들고 나오셨다. 역시나, 그분이 사과 테이블을 만드신 주인공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해 사과가 너무 많이 열려서 성하고 좋은 사과만 골라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게 두었다고 하셨다. 그 마음이 참으로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광경을 혼자 보기는 아까워서 학교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을 여러 명 모았다. 이들은 나처럼 한 번도 사과나무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인도, 일본, 중국, 대만의 대도시에서 자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할아버지네 사과 테이블에서 신나게 무료 사과 쇼핑을 하고, 집에 와서 다 함께 사과잼과 사과 파이를 만들어 먹었다. 좁은 부엌에서 천천히 사과잼을 뭉근히 졸일 때 나는 달콤한 향기와 ‘폭폭’ 하고 공기 방울이 터지는 소리는 낯설고 씁쓸한 외국 생활을 달달하게 어루만지는 힘나는 경험이었다. 함께 만든 쨈은 후에 사과 주인 할아버지께도 나누어 드렸다. 할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영어를 거의 못하셔서 지나가는 동네 청년을 붙잡아 통역사까지 대동하고 동네 이야기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때는 몰랐지만 수줍음 많은 핀란드 사람이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라는 사실을 핀란드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사과나무가 나누어 준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지역 주민과 한 번도 소통할 기회가 없었던 나와 같은 외로운 이주민들이 사과나무를 통해서 핀란드 현지인들을 만나고 음식과 삶을 교류하는 시스템을 제안하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결과 전시에서는 학교 근방의 동네 지도를 벽에 그리고, 사과를 공유하는 곳의 위치를 표시했다. 그리고 내가 사과나무를 찾으러 동네 산책을 시작한 것부터 할아버지를 만나고, 친구들을 모아 워크숍을 진행한 과정을 엮어 영상으로 만들어서 공유했다. 물론 영상을 재생한 구형 애플 스크린 옆에는 할아버지네서 가져온 향긋한 사과를 가득 올려 두고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사과를 나누어준 지역 주민이 전시에 방문해서 자기 집 정원의 사과나무를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관람객과 함께 전시장 주변 집에서 사과를 얻어오고, 전시장에서 다같이 달콤한 사과잼을 만들었다.




그때의 따뜻한 경험으로 사과나무가 있는 집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함께 살 집을 구했을 때 그 꿈이 이루어졌다. 사실 헬싱키의 거의 모든 집 정원에는 크기와 상관없이 사과나무 한 그루쯤은 있었으므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사과가 유난히 많이 열렸던 여름날 사과나무 아래에서 평생 좋은 친구를 하기로 달콤한 약속을 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작고 빨간 아가는 사과를 엄마의 젖만큼이나 좋아했다.


사과나무를 사 계절 동안 지켜보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겨우내 사과나무 가지에는 하얗게 상고대가 끼어 어쩌다가 내비친 붉은 겨울 햇살을 받으면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거기에 새들도 미처 다 못먹은 빨간 사과가 무거운 눈보라 속에서도 매달려 있으면 정말로 기특한 마음이 든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긴긴 겨울을 보내고서 느닷없이 봄이 찾아오면 매일매일 자라나는 초록 잎을 보는 재미가 아기가 쑥쑥 크는 것을 보는 것만큼 신기하다.


1월의 사과나무


6월의 사과나무

그러다가 날이 떠 따뜻해지면 밑단이 발그레한 하얀 꽃을 팡 하고 터트린다. 부드럽게 달콤한 사과꽃의 향기와 풀 내음이 섞인 공기는 최대한 욕심껏 자주 들이마셔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 꽃이 절정에 달하면 얼마 안 가서 꽃 비가 내린다. 그리고는 꽃이 있던 자리에 사과가 성실히 여물어간다. 새벽까지 떠 있는 여름 해를 듬뿍 받으며 굵어진 사과 알은 늦여름이 되면 여지없이 탐스럽게 열려서 아무 노력도 없이 부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의 돌봄 없이 혼자서도 잘 자란 사과를 먹으면 슈퍼에서 파는 사과 맛이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달기는 과수원의 사과보다 덜하지만 새콤하고 진득한 향이 이제껏 먹은 사과는 가짜라는 생각이 든다.



8월 아침의 사과


사과가 열리는 늦여름이면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정원에 나가서 사과 몇 알을 딴다. 간단한 오트밀 죽과 커피를 내려서 사과가 알알이 열린 반짝이는 풍경을 보면서 가족과 함께 느긋한 아침을 먹는다.

나를 공짜로 행복하게 만드는 하루의 첫 일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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