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후나 Jun 18. 2024

6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6월 10일 월요일


오월은 마치 미친 것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격렬하게 제 명을 다하고 극성스러운 여름이 되었다.

_ 박완서, <그 남자네 집>, 170쪽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별안간 아기의 첫 통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게 오늘이어야 한다고. 이 마음이 아무 맥락 없이 솟았다. 결연한 표정이 돼서 은행에 제출할 서류를 구하러 아기띠에 9kg이 된 딸을 메고 주민센터로 향했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아기에게 노래도 불러주고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 멍멍멍) 지나가는 강아지들과 인사도 하며 (또 멍멍멍) 너도 이제 금융 거래를 시작하는구나, 기특해라, 하며 마음에 몸이 붕 하고 떠오르는 것 같았다. 파란 하늘에 막 피어오른 뭉게구름을 잡아 올라탈 기세였다.


그리고 10분도 안 돼서 이 문장을 떠올렸다. 극성스러운 여름. 그래, 여름이 되었지, 그걸 왜 간과한 거지. 도대체 왜 정오에 집에서 나온 거지? 돌아갈까 하다가 차라리 주민센터 에어컨 바람이 간절해져서 더 빨리 걸었다.


그럴수록 내 체온도 빠르게 올랐다. 37도에 육박하는 엄마와 찰싹 붙어 있으니, 애도 덥다. 울기 직전의 아기에게 떡뻥을 5개나 연달아 입에 밀어 넣으며 겨우 주민센터에 도착했다. 제발 에어컨 제발.


주민센터도 더웠다. 기후 위기라 관공서에 냉난방 온도 제한이 있다던데, 실행이 잘 되고 있었네. 주민센터는 더웠지만 전 세계 어느 관공서보다 빠르게 일 처리를 해줘서 감사했다. 자, 이제 은행으로 가자. 밖에 나오니 해는 더 극성스러웠다. 이제 구름도 강아지도 보이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와 확연히 다른 나를 보며, 시키지도 않은 일을 사서 하는 나를 보며, 나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나로 사는 일도 참 고되다 싶었다.

06월 11일 화요일


뭐 좋아하고 지냈어?

_ 밑미 리추얼 메이트 령 님


밑미 문장메모 리추얼이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령 님이 이 문장을 올려주셨어요. 벌써 2년쯤 되었네요. 이 질문을 알고 얼마나 자주 써먹었나 몰라요. 인스타 스토리로 어떻게 사는지 대충 알 것 같은 친구들에게도 이 질문을 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해요. 남편에게도 가끔 해 보는데, 일상적 대화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대부분 자동차나 오토바이 부품 이야기라 지루하긴 하지만요. 엉엉)


그동안 잘 지냈어? 대신 이 질문을 더 자주 하고 살아야지, 또 다짐하면서 적었습니다.

06월 12일 수요일


가정은 화목해야 한다는 강박

가정은 불안하고 복잡하고 사고가 많은 곳이에요.

_ 정희진,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 2024년 5월호, 어떤 정당방위 <가족을 끊어내기로 했다> 꼭지 중


한 달 전에 있었던 가족과의 갈등으로 아직도 심리적인 고통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까지 힘들 일인가, 내가 왜 이렇게 이 문제에 집착하는 걸까, 뭔가 내가 놓치고 있는 근원적 이유가 있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를 듣다가 이 부분을 따라 적었어요. 가정은 화목한 곳이라기보다는 불안하고 복잡하고 사고가 많은 곳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으니, 오류도 보통 오류가 아니었네요. 번지수가 틀렸어요.


이 메모를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았어요. 착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요.

06월 13일 목요일


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 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_ 최진영, <내가 되는 꿈>, 53쪽


대화가 뻔하다. 지루하다. 자주 하는 불평입니다.

내 쪽에서는 얼마나 뻔하지 않은 대화의 소재나 질문을 제공했을까, 성찰하게 하는 문장이라 곁에 두고 보려고 메모했어요.

06월 14일 금요일


내가 하는 일을 굳게 믿고,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결과로 폭발할 수 있는 복리를 믿고, 투자에 의지하지 말고 자생하는 법을 배워라. 이런 마인드로 최소 10년 정도 한 우울만 파면, 어쩌면 뭔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위대한 것들은 TTT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자. (TTT=Things Take TIme.)

_ 배기홍, 스타트업 바이블 뉴스레터 2024년 6월 13일자 중


생긴 지 얼마 안 된 스타트업에만 투자하는 회사(스트롱벤쳐스)의 대표가 보내는 뉴스레터를 받고 있어요. 2주에 한 번 정도 보내는데, 받은 지 10년도 더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뉴스레터 맨 마지막 부분을 따라 썼어요. 왜 그랬는지 정확히 모르고요. 며칠 지나면 제 마음을 알 수 있길 바라면서요.

가설 1: 내가 하는 일을 굳게 믿지 못하고 있다.

가설 2: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결과로 폭발할 수 있는 복리를 믿으려면 작은 것들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기 싫어해서 다짐하듯 써본 것이다.

가설 3: 최소 10년이라고요? 충격을 받아서 일단 쓰면 이해가 될 것 같아서 써봤다.

가설 4: 그것도 한 우물'만'을요? 정말요?

가설 5: TTT를 다시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아니면 전부 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내진 않겠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