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2차전을 위해서 잠을 좀 자두렴
겨울이면, 학부생 시절 무턱대고 따라나섰던 한 겨울의 태백산행이 떠오른다. 소위 산 좋아하여 등산을 즐기는 과 선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겨울산행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듣다가 뭔가 있어 보이는 저 무리에 끼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갈래요 손을 들었다. 늘 붙어 다니던 단짝 동기도 덩달아 같이 가기로 했다.
막상 산행 날이 되어 기차를 타고 강원도 어느 역에 도착을 하고 말았다. 겨울 산행은 처음인 데다가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어둠을 뚫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너무 겁도 없이 따라나섰나 하는 후회와 약간의 겁이 났었다. 그래도 새벽 4시에 산을 타겠다고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속에 있으니 요즘 말로 인싸가 된듯한 기분에 산행이 기대되기도 했던 것 같다.
줄지어 시작한 산행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산행에 준비된 자와 준비 안 된 자들 사이에는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인파에 떠밀려 줄지어 느릿느릿 올라갔는데 어느 새부터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사람이 늘기 시작하면서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초보들이 걱정되어 보조를 맞춰주는 맘 착한 선배 몇 명만 남았다. 꼴찌로 오르니 뒷따르는 사람에 느꼈던 민폐감도 없고 아주 평온함을 느꼈다. 그제야 쫓기듯 오르는 속도를 조절하니 옆으로 펼쳐진 눈 덮인 산이 눈에 들어왔다. 저벅저벅, 헉헉, 휴우... 꼴찌 산행자들의 인기척만이 유일한 소리였던 것 같다.
울창한 강원도의 숲에는 제법 많은 생물들이 살았으리라. 겨울이 다가오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모두 어디론가 꽁꽁 숨었을 것이다. 완전히 고요함만 남으면 숨소리라도 들릴까? 분명 봄을 기다리며 어디선가 자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한 발 한 발 경사를 올랐었다.
이 산에 출몰하던 개구리와 뱀과 같이 외부 온도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동물들은 겨울의 온도감에 맞춰 체온을 떨어뜨린 채 굴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개구리와 뱀의 동면은 가사상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해외토픽에서 본 듯한, 불치병 치료를 위해 냉동인간으로 잠드는 사람들처럼 고통스러운 겨울을 잊고 살만한 때가 도래했을 때, 깨어나기 위한 잠 아닌 잠이랄까.
물고기는 어떨까, 태백산 어딘가 개울이 있다면, 아마도 물고기는 0도에 가까운 수면보다는 조금이라도 온도가 높은 물속 아래로 내려가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겨울을 보낼 것이다. 그냥 겨우 내 가만히 있다. 그런 이유로 빙어와 같은 찬물을 사랑하는 어류 외에는 겨울은 강태공에게는 별로 재미가 없는 계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울창한 태백산에는 방사한 곰들이 살지 않을까? 곰은 우리 사람과 같이 일정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정온 동물이지만 동면을 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가을까지 잘 먹고 만들어낸 두터운 지방층은 자는 동안 몸의 에너지원이 되어 자는 내내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동면 중이긴 하지만 옆에서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면 곰은 잠에서 깨어난다. 잠을 더 자고 싶은 곰은 조용한 곳 어디없나하고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게 된다. 아마도 잠을 깨운 이에게 화가 잔뜩 나있을지도 모른다. 흔치는 않다고 하는데, 임신한 채, 동면에 든 어미곰은 동면 중에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기도 한다. 대체로 잠을 자지만 중요한 때에는 깨어나 나름의 삶을 이어간다. 문득 눈을 밟는 소리가 크게 느껴져서 곰이 오면 어떡하나 잠시 걱정을 했었던 것 같다.
산에서 만나면 반가운 동물 다람쥐, 그리고 어디서든 만나면 신기한 동물 박쥐도 겨울잠을 잔다. 다람쥐와 박쥐도 곰과 같은 포유류이며, 정온 동물이다. 하지만 이 둘은 뱀과 개구리와 같이 겨울이 되면 체온이 뚝 떨어진다. 다만 외부의 온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스스로 체온을 냉장실의 온도 수준으로 떨어뜨려 모든 신진대사를 느리게 만든다. 평소에 분당 100-200회 뛰던 심장이 10-20회 정도로 아주 느리게 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박쥐나 다람쥐의 겨울잠을 방해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끼칠 수가 있다. 가뜩이나 절전모드인데 인간의 등장으로 에너지를 끌어모아 긴급 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은 박쥐나 다람쥐에게 굉장히 큰 일이다. 남은 겨울을 버티는 데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한 번에 다 써버리게 되므로 먹이활동이 여의치 않는 겨울에 잠에서 깬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친구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눈이 밟히며 뽀드득뽀드득하는 소리만 들리는 데, 이 소리가 부디 동물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첫겨울 산행, 그 뒤로 겨울에 산에 갈 기회는 스스로 만들지도 않았을뿐더러 무리에 낄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와 내 친구는 졸업을 앞두고 참으로 심란한 때였다. 대학의 졸업과 함께 찬란한 학창 시절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 우리에게는 겨울이 예견되었던 시점, 이 긴 겨울을 잘 버티면 봄이 오리라는 이야기를 하며 같이 해를 봤던 그 산행. 태백산의 동물들이 깨어나 봄을 맞이한 것처럼, 봄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온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