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는 양력이라고요.
동네 단골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카페 사장님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 기회가 쌓이게 되면 카페 사장님의 어느 정도의 인생 스토리를 알게 되고, 또 본의 아니게 나의 정체를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게도 된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다른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카페 사장님이 나에게도 의견을 물어보면서 대화에 잠깐씩 초대될 때도 있다. 대체로 나는 사회적 예의를 차려 가볍게 대답하고 조용히 커피 한잔을 음미하며 책도 보다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시간이 되면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나선다.
단골 카페의 출입은 매우 일상적이고 단조롭고 평화롭게 시작하여 그렇게 마무리가 된다. 대체로는 말이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은 일상적이지 않고 뭔가 복잡하게 엉켜 들고 흑화 될 듯한 조짐이 감지될 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임을 거부하고 나서야 될 것만 같은, 그러나 다른 한 켠에서는 '안 돼! 그냥 있어! 귀를 막아!' 하는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은 그런 날이 있다. 반가운 인사로 카페 문을 열며 들어서는 익명의 이웃과 카페 사장님과의 대화 내용이 갑자기 내 귀에 불쑥 들어오게 되면서 나의 호수 같은 마음에는 돌멩이가 만든 파장으로 출렁출렁 거렸던 날.
'아, 어쩌지. 끼어들고 싶다. 그렇지만 안돼. 오, 노! 노!'
귀를 스쳐가는 어떤 내용이 고막을 뚫고 들어와 뇌에 꽂히는 그 순간, 내장 저 깊은 곳에 심장이 있었나 싶게 강렬한 힘으로 치고 올라오는 충동에 힘이 들었다.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발동된 것이다.
카페 사장님(이하 카) : 어서 오세요. (이미 손님의 취향을 안다) 따뜻한 카페라테, 맞죠?
익명의 이웃(이하 익) : (내 취향을 아는 카페에 굉장히 만족한다) 아하하 맞습니다.
카 : (손은 재빠르게, 시선은 단골에게) 해가 많이 짧아졌어요. 6시만 되어도 캄캄해요. 아침에도 어두우니까 괜히 게을러져요.
익 : 그러게요. 밤이 길면 괜히 더 추운 것 같아. (어르신들은 가끔 이렇게 말을 잘 놓으신다)
카 : (이제 거의 다 주문한 음료가 완성되고 있다) 그래도 곧 동지니까 팥죽 먹을 생각에 기대돼요. 평소에 팥죽 잘 안 먹는데 꼭 동지팥죽은 설탕 팍팍 넣어서 한 입 먹으면, 크으~
익 : 그렇지. 그렇지. 동지엔 팥죽이지, 나는 꼭 새알심 넣은 팥죽을 먹는다우
카 : (방긋 웃으며) 자 음료 나왔습니다.
익 : (음료를 받아 들며 말을 이어가신다. 카페에서 드시고 가실 모양) 참 음력이라는 게 신기해요. 기가 막히지 않아요? 동지도 그렇지만, 입춘만 지나면 또 날이 확실히 풀리는 감이 있고 말이죠. 우리 조상님들은 참 어찌 또 그렇게 지혜 로우 신지. 음력이 참 잘 맞아.
삐용삐용삐용!
이 순간이 갑자기 대화가 들렸다. 문제의 그 시점이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어르신, 지금 동지가 음력이라고 하셨나요? 음력이 잘 맞는다고요? 24절기는 양력입니다! 음력이 아닙니다아아아악!'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아실리 없는 어르신과 카페 사장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그 대화는 끊기게 되었다. 음력 동지설을 믿는 어르신은 남은 커피잔을 들고 밝게 인사를 하고 가시던 길을 가셨다. 카페 사장님은 다른 손님들의 음료를 챙겨주신 후, 혼자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카 : 오늘 커피 어때요? 로스팅한 게 잘 되었어요. 맛있죠?
나 : 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사장님을 본다)
카 : (저 손님이 할 말이 있는 건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아.. 별로예요?
나 : 아니요. 커피는 맛있어요.
카 : (커피는 이라는 말이 신경 쓰인다) 무슨 일 있어요?
나 : 아니요
그렇게 말도 못 하고 나는 홀짝홀짝 남은 커피를 서둘러 마시고 일어나 짐을 챙기고 발걸음을 떼어 보려 했는데, '아, 못 참겠다.' 싶었다.
나 : 저... 사장님
카 : 아. 네.
나 : 아까 그 어르신이요. 동지...
카 : 아. 네네.
나 : 동지는 음력이 아니고 양력이에요. (에라 모르겠다. 입이여 자유를 만끽해라) 그... 입춘이랑 해서 달력 아래 작게 적힌 글자들 있잖아요. 24절기. 그건 양력이에요. 설이랑 추석을 음력으로 계산하는 거 하고는 다르거든요. 우리나라처럼 농사가 중요한 경우에는 무조건 태양을 기준으로 해요. 양력이 중요한 거죠. 수산업이나 뱃사람들은 달을 봐야 하니까 음력을 중시한 거고요. 달이 모양이 바뀌어서 날을 새기 좋으니까, 음력을 만들어서 쓴 건데.... 암튼...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아니 그 어르신께 드리고 싶었던 말씀인데(내가 TMI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동지는 양력이라고요. 그냥 맘에 걸려서
카 : 아. 그랬군요.
나는 그 길로 후다닥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