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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cent Jan 23. 2022

제목없음



대회 첫 시합이 2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팀원들과 치열하게 준비한 시간들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고, 제 몫을 온전히 다 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긴장이 늘어서인지 잠에 드려고 눈을 감을 때면 다가올 첫 시합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릅니다. 


헤드기어(Head gear)와 숄더패드(Shoulder pad)를 입고 있는 제 눈앞에, 제가 상대해야 할 상대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저보다 키가 10cm 더 크고 몸무게는 30kg 더 나가며 훨씬 높은 스쿼트 중량을 다루는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를 제가 상대해야 했습니다. 아니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 https://www.wired.com/story/the-tricky-ethics-of-the-nfls-new-open-data-policy/


 곧이어 상대 쿼터백(Quarterback)의 시그널 콜(Signal call, 플레이 시작 구호) 함께 스냅이 이뤄졌습니다. 저는 곧장 상대에게 달려들어 상대방의 져지(Jersey)를 잡은 채 볼(Ball)의 위치를 파악하려 합니다. 하지만 큰일 났습니다. 상대에게 도저히 힘으로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허리를 숙여 낮춰두었던 자세는 곧바로 반대로 꺾이면서 우뚝 솟아올랐고 저는 그대로 한없이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출처: https://www.al.com/sports/2010/12/auburn_vs_oregon_the_matchups_1.html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상대 볼 캐리어(Ball carrier)를 놓쳐버렸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상대방에게 공격 루트를 열어줘버렸습니다. 그리고 상대팀은 시리즈 갱신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다시 퍼스트 다운(First Down)에서 시작합니다. 전 실패해버렸습니다. 너무나 괴롭습니다. 


출처: https://www.thechampaignroom.com



 눈을 감은 채 떠올린 최악의 시나리오가 끝나자 저는 한 숨을 푹 내쉬고는 곧장 눈을 떠 물을 마시러 갑니다. 쉽게 잠에 들지 않고, 첫 시합이 두려워지기만 합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이제는 '안될 거야, 내가 무슨 수로......'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우울증(depression) 증세를 고백한 은퇴한 NFL Wide Receiver, Steve Smith Sr.  출처: https://www.nfl.com/playerhealth



 이제 정말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첫 시합 전날 각 포지션별로 작전을 정리하고, 팀의 Snap Signal을 숙지합니다. 그리고 상대팀의 경기를 분석했던 Seminar 자료를 바탕으로 플레이 시뮬레이션을 가볍게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 마음 속은 너무나 불안하고 걱정되었지만 이를 팀원들에게 티를 낼 수 없습니다. 사실 팀원들은 알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합 당일, 흙과 자잘한 자갈돌들이 한 데 뒤섞인 운동장에서 몸을 풉니다. '래더'라 불리는 어질리티(agility, 민첩성) 훈련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 간단한 태클 연습으로 몸에 가벼운 충격을 줘서 몸을 달굽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여보려하지만 그래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맴돕니다. 이제 이런 제 자신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출처: jparadise-diy.com


 경기 심판이 경기 시작 시그널을 보냅니다. 양쪽 사이드 라인에 머물던 각 팀 선수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그때 한 선배님이 저를 잡고 눈을 맞춰 이야기 합니다.


"긴장하지말고 연습한대로 해"


 말은 들렸지만 담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제 머릿 속엔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바람에 오히려 긴장된 얼굴만 비춰버렸습니다. 어쩌면 실패할 것이 분명한 제 자신을 포장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긴장한 얼굴로 있으면 조금이나마 팀에게 죄책감을 덜 수 있다는 약삭빠른 계산을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출처: https://ramblinfan.com/2021/09/16/la-rams-line-scrimmage-week-one-2021-nfl-season/

 

 경기가 시작됩니다. 제가 상대하는 선수는 팀의 Left Tackle 포지션을 맡고 있습니다. 오른손 잡이가 많은 쿼터백(Quarterback, 공 전달을 판단하는 포지션)에게는 흔히 '블라인드 사이드'(blinde Side)라 불리는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몸통 자체가 오른편으로 치우쳐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기에 왼편(Left Side)에서 다가오는 수비수에게 태클을 당하기('Sacked'라고 표현합니다.) 쉬운데 이 때문에, Left Tackle 포지션은 팀 내에서 가장 믿을만한 힘이 세고 경기 판단이 좋은 선수를 배치합니다. 



 이제는 상상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그동안 저를 괴롭혀온 그 상황이 정말 저에게 닥친 것입니다. 상대 쿼터백(Quarterback)의 스냅 시그널(Snap Signal, 공을 전달하는 팀만의 고유 신호)이 들립니다.


"Ready~ Set! Down... Hut! Hut!"


공이 스냅되었습니다. 상대팀은 2번째 'Hut' 신호에 공을 뽑았습니다. 저는 신호에 휘둘리지 않고 공이 뽑히는 순간 폭발적인 힘으로 상대 선수에게 달려들어 볼캐리어(Ball carrier, 볼을 운반하는 선수)의 길목을 차단해야 합니다. 이제 상대 선수에게 밀리지 않고 버텨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상대 선수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볼을 전달받은 상대팀의 런닝백이 제가 위치한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전진을 시도합니다. 다행입니다.


 곧바로 상대팀이 진영을 갖춥니다. 이에 따라 우리팀도 수비진영을 갖추고 땅에 놓여진 공이 스냅되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상대방의 스냅 시그널에 휘둘리지 않아야합니다. 오로지 공이 빠지는 것만 확인하고 달려들어야합니다. 


"Ready~ Set! Down... Hut! "


 이번엔 1번째 'Hut' 신호에 공이 스냅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상대 선수를 향해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지만 상대방을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루트로 공격을 시도한 것입니다. 4번의 기회동안 10야드를 전진해야 새롭게 기회를 갱신할 수 있는 상대팀은 2번째 시도에서도 10야드 갱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사실 상대선수는 저를 얕잡아보고 힘을 빼지 않으려 한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남들에게 비추지 않는 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었습니다. 사실상 치욕스러운 상황이었고 저 스스로 비겁했지만 불안감이 조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2차례 오른편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상대팀이 이번엔 제가 상대하는 Left Tackle이 있는 방향으로 공격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Reverse(리버스, 처음 공격루트로 상대 수비에 혼란을 주고 다른 볼캐리어에게 전달해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작전)를 시도한 것입니다.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blog.firstdownplaybook.com%2Fyouth-football-revers

 그동안 반응하지 않던 상대 Left Tackle 선수는 저를 힘껏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저는 그대로 밀려났고 결국 상대팀은 10야드 갱신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4차례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First down!"


심판이 10야드 갱신을 확인하고 새로운 '1st 다운'기회를 외칩니다. 


 제 비겁하고 안일한 플레이로 우리팀 수비들이 더 많은 체력을 소비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 순간을 실제로 맞닥뜨려버렸습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상대팀이 공격을 시작하기 전 짧게 모이는 '허들'(Hurdle, 경기 중 경기장 안에서 플레이어들이 모여 작전을 나누는 짧은 시간)에서도 고개를 숙이고 동료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천천히 막자! 하나씩 하나씩 괜찮아 괜찮아!"


팀을 독려하는 디캡(Defense Captain, 수비팀 주장)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오로지 제 탓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했습니다.


다시 상대팀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금 한껏 긴장된 몸을 느끼며 공이 스냅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스냅되는 순간 상대선수에게 달려듭니다. 이번에도 상대선수가 있는 힘껏 저를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또 같은 리버스 작전이었습니다. 이 리버스 작전을 막으려면, 수비에서 가장 앞선을 맡고 있는 제가 가장 먼저 파악하고 리버스!라고 외쳤어야합니다. 그런데 터무니 없이 압도적으로 밀려버리는 바람에 팀 동료들이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시한번 10야드 갱신을 내줘버렸습니다. 새로운 시리즈 갱신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제가 두려워했던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한 이후로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했던 것이 일어나버렸고, 결국엔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질게 뻔하고 부서질게 뻔하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했습니다. 


 다르게 생각해봤습니다. "힘으론 상대를 대적할 수 없다. 볼 캐리어가 가는 길목을 내 몸으로 막아버리자"


그랬습니다. 상대선수와 정면승부하기 보다 측면으로 빠져 들어가서 길목을 막아보려는 시도를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이제 상대팀은 득점권에 들어왔습니다. 어찌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심산으로 마인드 셋을 했습니다. 


 상대팀 쿼터백의 스냅 시그널이 들립니다. 그리고 공이 스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곧장 상대선수 오른편 빈공간(제 시각에서는 상대선수의 왼편 빈 공간)으로 다이빙 하듯 컷 블락(Cut block, 앞으로 몸을 내던지면서 낮게 블락을 하는 것)을 시도했습니다. 상대 Left Tackle은 자빠지듯 다이빙하는 저를 잡지 못했고 저는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상대 볼캐리어의 발목을 낚아챘습니다.


이 장면은 반칙입니다.... 비슷한 이미지를 골라봤습니다. 출처: https://www.si.com/


 볼캐리어는 벗어나려 발을 새차게 끌었지만 저는 곧장 겨드랑이쪽으로 상대 볼 캐리어의 발을 끼웠습니다. 


"삑~~"


심판의 휘슬이 불렸습니다. 상대팀의 공격 실패였습니다. 


뭔 일인가 싶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플레이를 제가 해버렸습니다. 얼떨떨했지만 경기는 지속됩니다. 뭔가 해볼만하다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은 또 다른 작전으로 우리팀을 따돌린 채 터치다운을 성공시켰습니다. 그토록 제가 두려워했던 상황은 벌어졌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나 뿐입니다. 그저 있는 힘껏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중량이 많이 나가는 상대방에게 힘껏 돌진하면 그 충격은 고스란히 제가 받아야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물러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냅다 들이 박기 시작합니다. 비록 한없이 밀려나면서도 말입니다.


결국 이 날 경기는 우리팀이 지고 말았습니다. 실력차가 분명한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게는 후회가 남는 날이기도 합니다. 경기를 져서가 아니라, 되든 안되는 뭐라도 해보지 않고 도망가기 급급했던 제 자신이 후회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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