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삶>을 읽고
이 책은 C.S. 루이스의 유명 저서와 잘 알려지지 않은 에세이, 편지 등에서 ‘삶의 변화를 낳는 독서 행위’에 대한 글을 엄선한 것이다. 사실 이런 책을 나는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여러 저작들에서 긁어모아 펴낸 책보다는 차라리 저자가 쓴 책 한 권 온전히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이 효용이 있다면 저자가 쓴 저작들 중 몰랐던 저서를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할까, 아니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꺼내기 쉬워서라고나 할까. 사실 이 책 덕에 저작들(에세이)에 흥미가 생긴 것도 맞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서 읽었으니 나로서는 그 효용에 만족한다.
그런데 루이스의 ‘책 읽는 삶’보다 책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에 나는 더 관심이 갔다. 많은 독서가들 특히 유명한 독서가들은 저마다 책을 다루는 스타일이 다르다. 어떤 독서가는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이 있는 부분을 ‘찢는다’고 했다. <서재 결혼시키기> 저자도 책 한 귀퉁이를 ‘접거나’ 무언가로 ‘쓰고’ 심지어 자녀들이 책을 ‘망가뜨려도’ 상관없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루이스는 “책에 손때를 묻히거나 귀퉁이를 접는 것만은 못내 부끄럽게 여겼다.” 지저분한 손으로 책을 잡거나 “단단한 책표지를 갈라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뒤로 꺾고 페이지마다 흔적을 남기는” 상황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다. 이런 독서가를 만날 때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내 신념이 “책을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말자”다. 인덱스가 되어 있어서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만큼 내 책들을 보살피겠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유가 가장 크다. 책을 읽을 때마다 손을 씻는 이유도 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물론 요즘은 정반대 이유로 손을 씻는다. 어떤 책들은 오래되어서 내 손을 더럽히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조금 변화가 생겼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바로 붙잡기 위해 책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타협이라면 무조건 연필이어야 한다는 것. 아마 루이스가 보면 “배신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생각들을 붙잡겠다고 핸드폰 앱을 켜서 쓰는 작업은 번거롭고(빨리 치지 못한다), 어딘가에 써두면 항상 그것만 잃어버리는 악독한 인연 탓에 연필로 그때마다 책에 쓰기로 결정했다. 최근 읽은 <독서의 기술> 작가도 ‘행간 쓰기’를 말하면서 “페이지 여백에 써넣기를 한다”라고 했다. 어떤 곳을 읽다가 생각난 질문이나 대답을 기록하기 위해서, 또 복잡한 논의를 간단한 글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주요한 논점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나는 책에 쓰기 시작했다. 책에 무언가를 쓴다는 사실만으로 나름 큰 결정을 한 셈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책을 험하게 다루는 건 아닐까? 하는 나를 루이스가 한심하게 볼 수도 있겠다. 너마저. 너조차. 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