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불명, 두 번째
가을 편지가 되기를 바랐으나 야속하게도 겨울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제 게으름 탓입니다. 어젯밤에는 비가 요란하게 내렸고 그 비는 월드컵 열기를 식히지 못한 듯 보입니다. 저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호밀밭의 파수꾼>과 <데미안>을 읽었습니다. 마침 파수꾼에는 주인공 홀필드가 겨울비를 맞는 장면이 나왔고 그가 소설에 자리한 위치와 그가 느꼈을 기분을 이 계절감과 날씨로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 노력했습니다.
선생님은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아, 그러고 보니 이 편지는 수신인과 발신인을 서로 모른다는 특징이 있군요.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답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도 이 낭만에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지 자체가 갖는 고귀함이 있지요. 왜 그럴까요.
문자와 e-mail, 카카오톡을 비롯해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개가 많이 있는데도 편지를 대체할 만한 매체가 없다는 점은 신기합니다. 편지는 진심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다른 형식으로도 짐심은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손글씨 때문일까요? 손글씨를 담은 작은 쪽지에 설레기도 하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편지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낱글자에 '너'를 생각하는 정성스러운 마음과 오래 고민한 흔적과 남몰래 간직해온 어떤 간절함 그리고 첫 줄에 '너'의 이름을 쓰기까지 온 힘을 다해 짜낸 용기. 그래서 어쩌면 편지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찌 보든 편지를 대체할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겠어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어떤 책 읽으시는지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그 답을 들을 수는 없겠군요. (그래서 이 질문은 저에게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책을 읽는가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책은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꾸어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는 안부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