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새의 선물』, 문학동네, 2022, 3판
열두 살 '나'(진희)는 어쩐 일인지 어른스럽다. 스스로도 더 이상 성숙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할머니, 이모, 삼촌과 사는데, 할머니가 "'나'와 이모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마지막으로(최종적으로) 선택받는 사람은 이모일 거라는 생각"에 슬퍼하면서도 '나'가 바라는 것은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런 "삶의 짓"('나'가 어찌할 수 없는 주어진 것)이 자기를 조롱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나'는 삶을 멀찌감치 두고 본다. 삶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나'는 삶을 살아갈 방식을 스스로 택하는데, 그 방식이 '보여지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로 분리해 사는 삶이다. 예를 들면 슬픔을 느낄 때조차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로 자아를 분리시키고 바라보는 '나'는 슬픔을 느끼는 '나'를 일부러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속이 덤덤해질 때까지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면서 극복한다. 이런 삶이 '나'를 조숙하게 한 반면 삶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태생의 고뇌"는 "성숙의 자양"이 되었고, 특히 독서라는 또 다른 자양과 합해지면서 삶에 대한 통찰을 완성시켰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할머니의 보살핌에서 '나'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살지 않았으며 "감정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타인에게 굴복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깨닫는다. 부모에 대한 생각이 슬픔을 몰고 온다면 그런 슬픔이 약점이 되기 때문에 경계한다.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의도대로 반응하며 살지 않는 더 이상 성숙이 필요하지 않은 주인공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두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첫째, 저자가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당시 시대상의 문제, 둘째는 제사題詞로서 실린 자끄 프레베르의 시와 이 책의 연관성이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것이 소설 이해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첫째, 소설은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낮밤이 다르게 주인이 변하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1969년, 박정희의 3선을 위한 개헌안 등이 소설 배경으로 흐르면서도 인물이나 대사를 통해 정치 사회적 판단을 유보하는 이유는 열두 살이라는 화자를 내세웠기도 했지만 원체 소설은 보여주는 것이고 판단은 독자 몫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재선 가능한 투표 결과가 나왔을 때조차 "그것 역시 너그러운 세월에 의해 그런대로 익숙"해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90년대의 '나'가 무마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화자가 어리다거나 판단은 독자 몫이라는 답도 부질없어진다. 아예 보여주기를 거부했으며 심지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서울법대생 삼촌의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장면 자체가 나오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겠다. 보여주기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냉소적이어서일까. “90년대지만 지금도 세상은 유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베트남전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서 위선과 악의를 배워가며 이형렬들은 군대에서 애인을 구하고..” 시대와 삶의 반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위악적이고 냉소를 품고 있다. 비관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낙관도 아니다. 떨어져야 할 열매가 떨어졌을 때, 숲속의 모든 동물이 놀라 다 뛰었고, 숲은 숲이 생긴 이래 최대 위기를 맞는다는 일화만 봐도 그렇다. 삶을 그런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의 총체로 보는 것이다. 삶은 농담이라는 '나'의 통찰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 시각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데, 자칫 운명론적 가치관에 머무는 전근대적 소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팔자소관"이라는 할머니의 말에는 일종의 체념관이 묻어있다. 이것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자아 분리를 하는 '근대적 개인'에 의해 소설로서의 한계는 극복되지만 그것은 한 인물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자기방어적 기제일 뿐이다.
시대 상황에 대한 판단 보류를 당시 이 소설이 출간된 90년대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면 어떨까. 서평가 이현우도 이 작품을 90년대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이면을 짚고 있다. 69년의 '나'와 92년의 '나'를 등치 시키면서, 열두 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70, 80년대를 그대로 "괄호" 안에 넣었다고 평가한다. 주인공의 "20대 시점, 30대 시점에서의 이야기"를 "다 괄호 쳐서 날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현우는 이 소설에 열광한 독자 현상에 대해 "이 두 시대를 부담스러워하는 대중적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보았다.
둘째, 이 소설은 제사題詞로서 자끄 프레베르의 시 <새의 선물> 전문을 싣고 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소설 제목과 동일한 이 시는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앵무새가 가져다준 희망을 해가 거부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열두 살 '나'는 친부와 만나고 새 가정으로 편입되어 살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나'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현재의 '나'는 사랑을 나누면서도 보여지는 '나'를 연기했다는 것에서 여전히 과거의 '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기로 선택한 것은 '해' 자신이다. '해'로 비유되는 진희도 어린 시절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열두 살 이후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인공이 실은 더 성장해야만 하는 미성숙한 개인이라는 역설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살아갈 70년대와 80년대 그러니까 진희의 20대와 30대가 격변의 시대일 것이어서 (내가 그 시절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에 부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7,80년대 거대 담론을 저자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일 것이며, 그게 불가능하다면 역설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둘 모두를 취함으로써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의의를 가졌다.